내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선배네 집에 갔을 때 벽에 붙은 〈보왕삼매론〉을 봤을 때다.“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로 시작하는 보왕삼매론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끌었다.이제 갓 대학
십여 년 전, 어느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절 아랫마을에 식당을 하는 맘 좋은 보살이 있었다. 이 보살은 보증을 서거나 꿔준 돈을 못 받아 늘 형편이 어려웠다. 그 보살의 친구가 보살을 데리고 절에 왔다.“스님, 이 친구는 맘이 너무 착해 늘 당해요.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또 돈을 꿔주고 못 받고 합니다.”스님이 그를 쳐다보고
사회가 변하면서 가족이라는 개념도 변했다. 예전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한정해 가족이라 했지만 현재의 가족은 ‘혈연, 인연, 입양으로 연결된 일정 범위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라며 그 범위가 넓어졌다. 가족의 구성에서 ‘사랑’이 우선인지, 구성원의 ‘자격’이 우선인지 질문을 던진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남에게 베풀면서 착하게, 양심적으로 산다고 재난이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보다 일어났을 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삶을 이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두 영화를 골라봤다.대지진 (펑샤오
여기 남들이 보면 절망적인 삶이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있다. 하나는 가벼운 톤으로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처절하게 그렸다.
불교에서 시작한 ‘자비’라는 단어가 ‘이타심’이라는 말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상이다.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경제’에도 이타심이나 공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불평등의 심화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해결하는 방안에 전문가들이 머리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예술은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자기 안의 위대한 본성을 일깨워 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현재의 삶에 자유를 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실제로 예술은 자본주의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풀려나 좀 더 관조적으로 세상을 보길 권한다. 현실과 떼어놓음으로서 더 객관적으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 중 가족의 죽음이나 본인의 질병 등의 본질적인 고통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인간관계가 문제가 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 문제 되는 인간관계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달라서 벌어지는 일이 대부분이다. 가치관이 달라서이기도 하지만 출생지역이나 풍습 등 태어나면서부터 멍에처럼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보통
일부 폭력적인 청소년 때문에 청소년보호법을 손봐야 한다는 여론이 꽤 높게 형성된 적이 있다. 하지만 성년이 되지 않아 미성숙하다는 의미의 ‘미성년자’에게, 선거권은 주지 않으면서 범죄에 대한 단죄는 어른처럼 하자는 여론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특히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아닐 경우 용서보다는 재빠른 단죄로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 〈SKY캐슬〉은 우리나라의 부모·자식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무조건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열 달을 뱃속에 품으며 나의 숨을 받고, 내 먹은 음식을 먹고, 내가 자면 휴식을 얻던 존재.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에게만 알릴 수 있던, 온전히 내게 기대던 존재. 하지만 아기에서 아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면서 엄마는 점점 자식에게 손을 떼게 된다. 그러다 성인이 되면 엄연한 한 개체가 되어 살아간다. 이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을 내어주고 지켜봐주는 것은 어느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통틀어 아름답게 묘사된다. 하지만 모정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걸까? 모든 모정이 다 아름다운 것일까? 소개하는 두 영화는 이 질문을 화두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