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재길 초입인 월정사 전나무숲길.

길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문명과 문명을 잇는 통로입니다. 길을 따라 사람이 오갔으며, 문화가 전해지며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문물이 유럽까지 전해진 통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과 인도, 중앙아시아의 문명이 동아시아로 전래된 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길은 구법과 정진의 상징입니다. 선재 동자는 법계에 들려고 53선지식을 찾아 길을 나섰고, 남녀노소, 종교마저도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해답을 찾으려고 매년 수십만 명씩 800km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찰을 오가는 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시원하게 뻗은 포장도로를 따라 쉽게 오가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을 정진하듯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여의려고 떠난 구법과 정진의 길이요, 또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불전에 올리는 기도의 길입니다.

선재길은 평창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잇는 10km 남짓한 옛길입니다. 이 길은 1960년대 말 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스님과 불자들이 오가던 오솔길입니다.

길에는 세상사가 깃들기 마련입니다. 선재길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한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로애락(喜怒哀樂),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세상사가 읽다만 책 속에 끼워둔 책갈피마냥 하나둘 말없이 펼쳐집니다.

삶과 죽음〔生死〕

선재길 초입인 월정사 전나무숲길에 들어서면 삶과 죽음의 대비를 만납니다. 온갖 생명의 계절을 맞아 선재길 초입에서도 노란 피나물과 하얀 홀아비바람꽃, 연분홍 진달래, 보랏빛 현호색이 수줍은 웃음으로 순례자를 반깁니다. 오가는 길손에게 홍진의 명리를 내려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주문 신장상에 주눅 든 마음이 금방 풀립니다.

누군가 간절함을 담아 치성했을 성황당을 지나쳐 햇살 고요한 전나무숲길을 걷다 보면 600년 세월을 버텨낸 장엄한 죽음을 맞닥뜨립니다. 전나무숲길에서 가장 오래된 전나무였다지요. 온갖 세월의 풍상을 견디어 냈을 전나무는 2006년 10월, 세상과의 인연을 다하고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전나무는 죽어서도 산짐승과 벌레, 초목에게 넓은 제 품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다람쥐에겐 쉼터가 되어주었고, 애벌레에겐 생존의 터전이 되어주었습니다. 넘어진 자리에 뿌리를 내린 초목은 죽은 전나무를 양분 삼아 싹 틔우고 열매 맺으며 생장해 갈 것입니다.

▲ 평창 오대산 월정사.

기쁨〔喜〕

전나무숲길 끝에 이르면 천년 고찰 월정사가 기다립니다. 월정사는 오대산 불교문화의 중심사찰입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1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성지입니다.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대에는 각각 1만, 모두 오만의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합니다.

월정사는 자장 율사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선덕왕 12년(643)에 창건했다 합니다. 자장 스님은 중국 유학 시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해 받았는데, 진신사리 일부를 이곳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 모셨다 합니다.

오대산에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상원사 동종과 목조문수동자상 등 여러 점의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가 있습니다. 또 영감사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지와 수호사찰 영감사도 있습니다. 모두 선재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민족의 보물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선재길 곳곳에는 여러 작가의 설치미술이 숨어있습니다. 한적한 산길을 걷다 만나는 설치미술 작품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불교와 문화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선재길을 오가며 수많은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문수성지를 참배하고, 수많은 불교문화재와 설치 미술을 만나는 즐거움은 순간 저물고 마는 세간의 쾌락에 비할 바 아닙니다.

▲ 선재길 곳곳에 만날 수 있는 설치미술 작품 중 하나. 하종우 작 ‘그 또한 찰나인 것을’.

▲ 선재길은 오대천 계곡을 따라 20리가 넘게 이어진다.

▲ 선재길은 오대천 계곡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화〔怒〕

월정사를 나서면 본격적으로 선재길이 시작됩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선재길은 때로는 오대천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때로는 계곡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10km 남짓 이어집니다.

선재길은 구도의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기도 했습니다. 회사거리에서 섶다리를 거쳐, 신성암까지 6km 남짓 되는 선재길 곳곳에는 화전민이 생활하던 터가 남아있습니다.

화전민 터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됩니다. 일제는 동양척식회사를 이용해 월정사에 빚을 지게 한 후 사찰 소유 산림 벌채권을 갖습니다. 산림 벌채 인력이 모여들며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벌채 일이 없는 봄부터 가을까지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화전을 일구었습니다. 화전민은 한때 150여 가구에 이르렀지만 현재는 담장, 석축, 온돌 등 40여 가구의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화전민터에는 목재를 운반하려고 설치한 목차 레일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또 오대천 계곡에는 보를 막아 목재를 차곡차곡 쌓아 둔 뒤 비가 오면 터트려 한꺼번에 이송했던 보메기, 목재 가공공장이 있던 회사거리 등이 아직도 남아 인간사 흥망성쇠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선재길 곳곳에는 산림 벌채 인력이 모여들어 형성된 화전민 마을 터가 곳곳에 남아있다.

슬픔〔哀〕

▲ 1965년 7월 폭우를 만나 숨진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원 10여 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연화탑.

선재길을 걸으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대천을 넘나들며 이어지던 선재길이 오대산장에 이르면 곧 숙연해 집니다. 이곳에는 연화탑(蓮花塔)이라 부르는 삼람 키만 한 부도탑 한 기가 쓸쓸히 서 있습니다.

1965년 7월 10일 월정사에서 수련하던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원 10여 명이 상원사 보산 스님 다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폭우를 만나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희생자 중 윤복순 불자는 떠내려가는 여법우를 구하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합니다.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가 이들의 구도정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듬해 이 탑을 세웠습니다. 김영두 교수가 비문을 짓고, 탄허 스님이 글씨를 썼습니다.

구도의 열정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져간 청년들의 자취를 돌아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이루지 못한 꿈을 마주하는 것 같아 진한 슬픔이 몰려옵니다.

즐거움〔樂〕

오대천을 품은 숲길은 걷는 이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다양한 생명의 군상은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두 손에 먹이를 쥐고 볼 가득 오물거리는 다람쥐도 볼 수 있고, 무리지어 핀 괭이눈, 얼레지, 현호색, 홀아비바람꽃, 제비꽃, 진달래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대산장 옆 자생식물원에선 멸종위기종과 30여 종의 특정식물 등 희귀식물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지장폭포와 보메기, 신선암, 꺼먹소 등 발길 닫는 곳곳마다 펼쳐진 절경도 피곤을 잊게 하고, 아름드리 나무가 품어져 나오는 피톤치즈는 세파에 찌든 심신을 풀어줍니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53선지식을 찾아 나선 선재 동자처럼 오대산 선재길을 따라 걷다보면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 먼 곳에만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뱃사공과 상인, 창녀에게서도 가르침을 구한 것을 보면 진리는 고상하고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숲길을 오가며 만난 다양한 생명과 자연, 인간의 손길이 만들어낸 문명의 흔적 속에도 생멸문(生滅門)을 여의고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길이 있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순례자가 길을 찾아 떠나는 이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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