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306-3호 삼국유사 권1~2. <사진=문화재청>

【원문】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함(도공道公의 다음에 역시 법심法深․의연義淵․담엄曇嚴의 무리가 있어서 서로 계승하여 불교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전에는 문헌이 없으니 여기서도 역시 조목으로 목차에 넣을 수 없다. 자세한 것은 승전에 실려 있다.)

제목이 《삼국유사》라고 해도 실제로는 《신라유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2책으로 분철되어 발간된 바 있다. 권 제2 ‘기이제이(記異第二)’까지의 신라 중심의 역사는 1책에, 권 제3 ‘흥법제삼(興法第三)’부터는 불교 전래 이래의 영험담 같은 설화가 2책에 실려 있다.

‘흥법’이란 법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불법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조목인 ‘순도조려(肇麗)’에서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순도 스님을 조명하고 있다. ‘기이’ 권 제1에서도 신라가 아닌 단군과 고구려 주몽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후로는 안 봐도 뻔하게 신라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고구려를 앞에 두고 뒤에 신라로 채운다”는 식의 의도나 원칙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여하튼 고구려가 신라보다 앞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것은 여기서 사실로 확인된다.

‘승전에 실려있다’는 말의 의미

순도 스님이 귀족이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작위를 받아서 그런 것인지 ‘도공(道公)’이라고 불렸다. 고구려에는 순도 스님 다음으로도 법심, 의연, 그리고 담엄 스님이 있어서 계속해서 불교를 진흥시켰다. 그러나 고전을 찾아봐도 쓸 만한 문헌이 별로 없어서 여기서도 따로 목차에 넣을 수 없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정말 없었을까? 법심이나 담엄 스님의 경우에는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 평원왕 18년(576) 전제(前齊)의 정국사(定國寺)에 주석해 있던 도통(都統) 법상(法上)에게 파견된 의연은 꽤 유명하다.

의연 스님은 알려진 바와 같이 어려서 출가하여 율의(律儀)를 잘 지켰고, 지혜가 깊고 이해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얼마나 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학의 뜻도 깨달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고구려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이니 유학도 공부했다는 의미로 들으면 될 듯하다. 여하튼 불교를 여러 사람에게 전하고자 해도 자신도 잘 모르고 불교의 역사조차 제대로 모르니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평원왕의 도움을 받아 불학을 공부하고 돌아왔으니 고구려 최초의 국비 아니 ‘왕비(王費) 유학생’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특히 중국에서도 번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십지경론(十地經論)》·《대지도론(大智度論)》·《보살지지론(菩薩地持論)》·《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등 논서의 영험 등을 배운 뒤 귀국하여 교화에 앞장섰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과 《속고승전(續高僧傳)》등에도 전하는 데 굳이 사료가 전하지 않는 법심과 담연을 앞과 뒤에 세우고 의연을 중간에 숨긴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좀 다른 이유가 있을 듯하다. 물론 시대 순으로 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앞뒤의 문장의 문맥을 생각해 보면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담엄 뒤에 더 자세한 것은 《승전》을 보라고 하는데 이게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이라면 생략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법심과 담엄은 참조할 문헌이 없는 것이고 의연은 승전을 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결국 의연이나 승전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거나, 여하튼 승전에 있는 걸 굳이 여기에 쓰지 않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화엄종 승려로 각훈, 그리고 일연은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일단 생각해 보면, 결국 승전에 적힌 것 외에 다른 내용이 없거나 별다른 의문이 없기에 그냥 언급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일연 스님이 이견이 있을 때는 원전을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그조차도 안하고 있기에 그런 입장에서 보면 각훈 스님을 존경해서 안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해동고승전》에 대한 《삼국유사》의 비판적인 태도를 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거꾸로 종파간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일연은 철저하게 각훈의 《해동고승전》을 인용하지 않거나 비판한다. 여하튼 이렇게 인용도 하지 않은 결과 1215년(고려 고종 2)에 저술되었지만 현재는 첫 번째 편목인 〈유통(流通)〉편의 일부만 전하는 《해동고승전》을 복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각훈에 대한 일연의 일침?

왜 일연 스님은 각훈을 이렇게 대한 걸까? ‘기이’ 권 제일의 서문에서 보이듯이 《삼국유사》에 투영된 일연의 역사인식이 비교적 사대주의적인 귀족불교의 입장을 대변한 《해동고승전》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듯싶다.

아울러 《삼국유사》는 《해동고승전》에 인용되지 않은 자료를 제시하면서도 인용 자료의 타당성에 대한 엄격한 평가도 하고 있다. 개인이나 종파 간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각훈의 대충대충 인용하는 듯한 《해동고승전》의 기술에 대한 일연의 일침이라는 측면에서 《삼국유사》를 해석하면 어떨까?

《삼국유사》에는 《해동고승전》이라는 완벽한 명칭은 보이지 않고, ‘해동승전’이 3번, ‘고승전’이 3번, ‘승전’이 10번 등장한다. 이 세 명칭 모두가 같다고 육당 최남선은 생각했지만, 이미 의천(義天, 1055~1101)의 시문집인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 16에 실린 〈제금산사적법사문(祭金山寺寂法師文)〉에 《해동승전》이라는 서명이 보이므로 승전은 하나가 아니다. 따라서 같은 책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책이라면 왜 세 개의 다른 약칭이나 있어야 할까? 저술 당시에 승전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면 지은이의 미숙성 또는 다른 지은이의 공동 저술이나 뒤에 추가해서 적은 추기(追記) 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더 말 할 것이 없다. 아무리 떠들어도 이 사례 하나만으로는 뭐라고 할 수 없으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뒤를 좀 더 세심히 살펴보면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을 듯하다.

한편, 《해동고승전》은 《삼국유사》외에도 요원(了圓)의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김휴(金烋)의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도 그 책 이름이 보인다.

이런 해석의 과정을 거쳐 요즘의 언어로 고친 내용은 이렇다.

순도 스님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다음에 법심․의연․담엄 등이 이어서 불교를 홍포했다. 고전에는 문헌이 없어 조목으로 만들어 목차에 넣을 수 없었지만, 의연 등 스님들에 대해서는 승전을 참고하면 된다.

하도겸 | 문학박사, 나마스떼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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