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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기라①

기사승인 2019.07.11  15: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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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도스님, 신라에 불교 기반 마련

아도기라(阿道基羅)

아도를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 제4에 전한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려(高麗)[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구미 선산]에 이르렀다.

아도의 한자 표기가 다르던가 또는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은 이름을 부정확하게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역사서 즉 사료에 따라 참고한 1차나 2차 자료에 적힌 표기법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 눌지왕에 대해서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 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이라고 한 것도 참고가 된다. 눌지의 ‘눌’을 표기할 때 부수인 말씀 ‘언(言)’변이 생략되거나 더해진 것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숫적으로는 ‘내지’가 맞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눌지’가 틀리다고도 할 수 없으므로 둘 다 통용하게 놔둘 필요가 있다. 한편 눌지왕은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고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선군의 모례(毛禮) 혹은 모록(毛祿)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아도스님을] 편히 머물게 해주었다. 마침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전해왔다.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나라에서 원표(元表)스님을 보내 그윽한 단향(溟檀)과 불경·불상을 보내왔다고 한다.

역시 모례, 또는 모록이라는 구미 사람이 스님을 자기 집 즉 토굴에 주석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고득상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해동삼국통력(海東三國通曆)》 12권 또는 《해동삼국통록(海東三國通錄)》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책일 것이라고 하는데 제목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서로 다른 책이라고 놔두는 것도 사료비판의 한 방법일 듯 싶다. 영사시를 《해동고승전》에는 ‘시사(詩史)’라고 하고 있다. 큰 차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본문 해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 듯싶다.

임금과 신하들 모두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싸들고 전국을 다니면서 묻었다. 묵호자가 보자마자, “이것은 향이라고 하는데, 향을 사르면 향기가 매우 강하여 신성(神聖)한 곳으로 정성을 통하게 하는데 쓰인다. 신성은 [불교의 불법승] 3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약 이 향을 사르며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눌지왕대는 진송(晉宋)시대에 해당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기도를 드릴 때 사용하던 ‘향’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더 신기할 따름이다. 불교 이전에는 도교가 있었고 토속신앙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향을 몰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듯싶다. 아마도 지금의 선향(線香)과 같이 고급스럽고 좋은 신제품 향을 과시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불교의 새로운 도구 즉 불구, 기도나 수행 관련 신제품을 홍보마케팅을 위한 박람회를 개최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이게 뭔지 알아맞히면 상품도 줬을 것 같고 그렇게 해서 묵호자를 당첨시켰을 듯 싶다. 어떻게 보면 불교 홍포를 위해서 묵호자가 꾀를 내어서 중국 동포인 양나라 황제까지는 몰라도 동료 스님과 기획을 함께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결과는 미미했나 보다. 상품이 냉장고나 TV였다면 결과는 달랐을텐데 고급 향을 가지고 전법하기에는 당시의 토착신앙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지금같이 유튜브나 페이스북, 아니 인스타그램만 있었어도 단숨에 조회수 몇 백 만을 넘었을 텐데 안타깝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여기에 일연 스님의 개인 의견을 덧붙여 ‘송’이 아닌 ‘양’나라라고 정정한 것은 내적 사료비판의 방법이다. 원 사료에는 ‘중국’ 즉 대륙이나 대국에서 왔다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료를 보고 1차사료를 만든 저자가 아무런 고려없이 불교를 숭상했던 양무제나 달마대사 등을 유명인들을 떠올려서 ‘양’나라라고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때 왕녀(王女)가 몹시 위독했는데, 묵호자를 불러들여 향을 사르며 소원을 표하게 하니 왕녀의 병이 씻은 듯이 바로 나았다. 왕이 기뻐하며 예물을 후하게 주었는데, 얼마 후에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향이 뭔지 알렸지만 홍보몰이가 제대로 되지 않자 왕은 왕녀를 이용한 또 다른 이벤트를 기획했다. 하지만 이 역시 홍보가 부족한 것인지 토착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지 실패했다. 결국 묵호자는 왕실에 머물지 못하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리고 서서히 기록속에서도 사라졌다.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 아도(我道) 화상(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간 머물다가 병없이 나이들어 죽었다. 그 시자 스님 세 분은 남아 계속 주석하면서 경율(經律)을 강독하니, 간혹 신봉하는 자가 있었다. 주(注)에서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서천축[西竺] 사람이라고 했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하였다.

갑자기 바꿔서 비처왕 즉 소지왕대로 내려온다. 묵호자 스님이 사람들 기억속에서 사라진지 오래, 아니 기록도 남지 않은 시대에 아도화상이 나타났다. 같은 시대도 아닌데 역시 모례가 등장한다. 결국 이 사료도 사실이라면 모례는 직함이나 성씨가 아닐까 싶다. 지역의 지도자급인 수장이나 제사장 아니면 여관 주인 정도 되는 분들의 직함이거나 유력 성씨라면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 듯싶다. 아울러 이들은 마을의 역사를 구전으로 전달했는데 “‘향’을 홍보하다가 쪽박을 찼다”고 하면서 남다른 외모를 가진 묵호자를 도깨비처럼 묘사했을 것 같다. 그래서 본적도 없는 아도 스님의 무리가 왔을 때 ‘예전에 왔던 묵호자같은 분들이 또 왔네’가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전과는 달리 몇 명 제자가 생겼으니 불교의 전교가 서서히 시절인연을 만난 듯하다. 여하튼 시대나 나라가 다르다 보니, 묵호자나 아도의 이야기와 나아가 그 출신국 등에 다양한 이론이 있었던 것 같다.

하도겸 .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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