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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눈높이에서 설하는 역동적 가르침

기사승인 2019.08.12  15: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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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설법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중생의 삼독(三毒)을 다 걸러내겠다는 뜻입니다.”

성주신을 모신 단 위에 가루를 곱게 칠 때 쓰는 체를 놓아둔 이유였다. 가정을 지켜주는 성주신의 보살핌을 바라면서 우리 또한 마음을 반듯하게 가다듬겠다는 다짐이다. 이처럼 분명하게 와 닿는 생활밀착형 가르침이 또 있을까. ‘땅설법’의 현장에서 만난 한 장면이다. 근래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방대한 무형의 불교문화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땅설법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땅설법의 전승주체가 강원도 산골의 작은 절이라는 사실이 경이롭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운데 불교명절이 있을 때마다 몇 달에 걸친 준비로 하나하나의 의식을 귀하게 여기며 수십 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지극한 신앙심과 종교공동체로서 희열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삼척 안정사(安政寺)의 다여(茶如) 스님과 신도들이 바로 땅설법을 전승해온 불교공동체의 주인공이다.

   
▲ 성주단에 올린 체를 들어 "중생의 삼독심을 걸러내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는 다여 스님.<사진=구미래>

작은 신앙공동체에서 전승해온 방대한 불교무형유산

땅설법이란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하는 법문’을 뜻한다. 불교가 들어온 이래 승단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전하기 위해 고심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불법을 펼쳤으니, 땅설법은 이러한 민간포교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하겠다. 고대 중국ㆍ한국ㆍ일본에서는 범패에 능한 스님들이 대중에게 경전내용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하는 속강(俗講)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이렇듯 사람들을 모아놓고 운문과 서사문을 섞어 표현하는 구비연행을 ‘강창문학(講唱文學)’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법회의 시원을 속강ㆍ강창에서 찾는가하면, 우리나라에서도 판소리가 불교의 강창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연구가 잇따랐다.

연등회ㆍ팔관회 등에서 보듯이 불교의례는 당대의 다양한 연희를 수용하며 중생의 삶과 어우러져 전승되어왔고, 이러한 불교의 역동성과 민중성은 땅설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민중의 애환을 함께하기 위해 백성들의 다양한 사연과 연희를 수용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땅설법에 실어 전해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기층사회로 스며들면서 의례와 민속은 오히려 다채롭게 분화됐으나 일제의 전통문화 탄압, 불교계의 의례 홀대로 무형문화의 전통은 하나둘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근래 문화재 지정과 맞물려 대형의례들이 복원되고 있지만, 구비전승에 속하는 땅설법은 한 번도 조명을 받지 못한 채 회향설법이나 삼회향놀이의 속칭 정도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다가 그 실체를 온전히 전승해온 안정사의 땅설법이 2018년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방대한 세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강ㆍ창ㆍ연이 어우러진 불교 종합예술

땅설법은 방대한 전승내용이 축적되는 가운데 점차 설행목적에 따라 몇 갈래로 체계화되었다. 안정사에서는 〈석가모니 일대기〉, 〈목련존자 일대기〉, 〈성주신 일대기〉, 〈신중신(身衆神) 일대기〉, 〈선재동자 구법기〉, 〈만석중(曼碩衆) 득도기〉의 여섯 가지 주제가 전승되고 있다. 땅설법만 독자적으로 설행하기도 하나, 대개 특정행사의 의례와 짝을 이루면서 의례성격에 맞는 주제의 땅설법을 펴게 된다. 이를테면 부처님오신날에는 ‘석가모니 일대기’, 백중에는 ‘목련존자 일대기’를 설행하며 순서는 신중권공 다음에 이어진다.

   
▲ 상단의 괘불 앞에서 설법하는 땅설법보존회 회장 다여 스님(안정사 주지).<사진=구미래>

땅설법의 방식은 크게 이야기 형태의 강(講), 가락을 실어 읊조리는 창(唱), 극적 요소의 연(演)이 뼈대를 이루는 종합설법으로 행해진다. 주제마다 여러 마당으로 구성돼있어 여섯 주제를 완창하려면 보름은 족히 걸리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마다 각각의 가르침[講]과 노래[唱]와 연극[演]이 어우러지고, 그에 따른 다양한 장엄과 공양물을 만들어 무대를 꾸미면서 불교 종합예술을 이어온 것이다.

여섯 주제 가운데 〈성주신 일대기〉와 〈신중신 일대기〉는 특히 민속적 요소가 짙다. 신중신 일대기를 사례로 살펴보면 신중신(身衆神)은 화엄성중으로 유입된 한국의 토속신으로, '104위 화엄신중(華嚴神衆)' 가운데 제96위로 좌정한 신격이다. 땅설법에서 신중은 여성으로 설정되어 ‘신중애기’라 불리면서, 고난을 짊어진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엄청난 서사와 민속을 풀어내고 있다.

일대기는 크게 출생과 성장과정, 결혼 후 출가하기 전까지의 삶, 출가득도해서 수행하여 화엄성중으로 좌정하기까지의 세 단계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부터 삼국을 거쳐 고려ㆍ조선ㆍ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당대의 역사와 백성의 사연을 주제에 맞도록 각색하여, 향가ㆍ시조ㆍ민요ㆍ판소리ㆍ창가는 물론 놀이와 단막극 등에 실어 전하게 된다. 따라서 법사스님은 민중들 사이에 연행되는 모든 민속을 연행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 모습으로 중생고난을 해결해주는 가운데 끊임없이 불법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다. 다여 스님을 보면 옛 강창법사들이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의 경전과 시문, 역사와 고전에도 밝아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자원을 지녔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렇듯 활짝 열어놓은 주제와 장르 속에서도 지켜야할 경계와 원칙은 분명히 설정해두고 있다. 부처님을 대신하는 법문이 아니기에 법사스님은 불단 앞에 비켜서서 가사 대신 장삼이나 두루마기에 미투리 등을 갖추고, 세속적 흥겨움을 유발하거나 승려의 위의를 흩트리지 않아야 하며, 악기 또한 법고나 장구로 제한하고 연주가 아닌 반주에 그치도록 하는 것이다. 열린 마당에서 신도들과 나란히 눈높이를 맞추어 설법을 펼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계(結界)는 엄정하다.

   
▲ "신중신일대기" 중 신도들과 함께하는 '귀신가두기'.<사진=구미래>

여법하고 체계적인 야단법석

안정사 스님과 신도들은 의례에 필요한 용구와 장엄ㆍ공양물 대부분을 직접 만들어 쓰고 있다. 나무 등으로 조성하는 각종 기물과 악기류는 물론, 야외에 거는 대형 괘불(掛佛)을 비롯해 번ㆍ지화ㆍ종이탑ㆍ가릉빙가 등 해당의례에서만 쓰고 태우는 종이장엄을 몇 달 전부터 일일이 만드니 그 정성이 놀랍기만 하다.

이를테면 2018년에 참관한 ‘화엄성주대재’의 경우, 야단법석의 상단에는 거대한 화엄세계를 나타내는 괘불을 모셨다. 그런데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반적인 채색불화가 아니라 종이를 오리고 접어서 조성한 괘불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비로자나삼신불을 중심으로, 부처님이 일곱 장소에서 아홉 차례 《화엄경》을 설한 7처9회(七處九會)를 형상화하고, 선재동자가 찾아 나선 53선지식의 위목(位目)을 각기 모셔 체계적인 화엄세계를 여법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나무를 깎아 세운 53불 공양탑과 종이로 만든 칠층의 화엄보탑을 마당에 세워 화엄세계의 환희로움을 드러내었다.

땅설법의 놀라운 점은 주제마다 탄탄한 기승전결의 시나리오를 지녀, 그에 맞는 장엄을 꾸미고 강ㆍ창ㆍ연의 내용을 구성해 독자적인 불교종합예술을 펼쳐나간다는 것이었다. 여섯 가지 주제에 엄청난 서사와 민속이 담겨 있어 하나하나의 구성요소에 대한 연구거리도 산적해있다. 이를테면 〈만석중 득도기〉는 그 자체로 주목되는 그림자극 법문으로, 40마당에 해당하는 방대하고 다채로운 스토리를 담고 있어 민속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는 분야이다. 이에 지난 5월 연희전공자들이 안정사 초파일에 참석하여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그림자극을 감상하며 감탄했다. 삼척에서는 6월에 오금잠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신중신 일대기〉에 들어있는 오금잠제(편집자주: 강원도 삼척에서 단오에 지내는 제사로 고려 태조의 유물인 오금비녀를 함에 모시고 무당을 불러 지낸다)의 양상을 보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수시로 안정사를 찾았다. 그 외 조선시대 감로탱의 의식 장면을 연상시키는 설단의 요소들, 종이를 접고 오려 거대하게 형상화한 암수 한 쌍의 가릉빙가, 성주단에 장엄한 수파련(水波蓮)의 삼단구조 등 장엄과 설단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도 주목된다.

이처럼 땅설법을 구성하는 사설과 놀이와 연행 또한 전승맥락이 끊어져가는 다른 예술장르의 전통을 담고 있어, 땅설법을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관련학자들이 먼 삼척까지 달려가는 것이다. 활짝 열어놓은 주제와 장르 속에서도 지켜야할 원칙이 분명하여 불교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을뿐더러, 경전에서 묘사한 어떠한 세계도 몇 달에 걸쳐 승속이 힘을 합해 척척 만들어내고 의례가 끝나면 미련 없이 태워버리는 호방함과 여법함이 그곳에 있었다. 기층민의 눈높이에 맞추는 불교의 포용성을 여실히 살필 수 있는 땅설법이 불교의례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임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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