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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스님 중등교육기관 인수·운영했다”

기사승인 2019.10.14  18: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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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학원 중앙선원에 사무실…관장, 수신·한문 강사
학계 보고 전무, 연보에도 누락…“사료 발굴 필요”

   
▲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이 조선통신중학관을 인수했다는 동아일보 제3442호(1930년 3월 16일자) 2면 기사.

재단법인 선학원 설립조사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스님이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등 통신교육기관인 조선통신중학관(朝鮮通信中學館)을 홍세뢰, 조성희 등과 함께 인수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재단법인 선학원이 만해 스님 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해당 사실을 소개한 <동아일보> 제3442호(1930년 3월 16일자) ‘조선통신중학 부활’ 기사와 <중외일보> 제1155호(1930년 3월 18일자) ‘조선통신중학 강의록 재발행’ 기사 등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했다.

홍세뢰, 조성희 등과 함께 인수

만해 스님이 통신과정이긴 하지만 중등교육기관을 인수·운영한 사실은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또 각종 만해 스님 연보에도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잊힌 사실이다.

두 기사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홍세뢰, 조성희 등과 함께 조선통신중학관을 인수해 안국동 40번지에 사무소를 두었다. 기사에 소개된 ‘안국동 40번지’는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재단법인 선학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도 이곳에는 재단법인 선학원 사무처와 중앙선원이 있다.

만해 스님과 함께 조선통신중학관을 인수한 홍세뢰, 조성희가 어떤 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홍세뢰가 만해 스님이 조선통신중학관 운영에서 손을 뗀 후 경영을 책임진 것을 보면, 인수 비용 상당수를 그가 투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동아일보 4237호(1932년 10월 4일자) 7면 ‘유력한 재단 얻어 여자미술교 확장’ 기사에 “김화군 원동면에 있는 원동금산재련소의 홍세뢰 씨”라고 소개한 것으로 미루어 제련소를 운영하는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해 스님 등은 교육기관 부족과 학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반 중등교육 희망자의 여망에 부응해 조선통신중학관을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만해 스님 등은 1930년 봄학기부터 《중학강의록》을 다시 발행하기로 하고, 새 경영 방법을 모색하고 강의록을 충실히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와 관련 <동아일보>는 “본 통신중학은 오직 하나인 조선문(朝鮮文)의 중학강의 기관으로 일반의 많은 기대를 받던 것인 바, 중간에 경영난에 빠져 수년 동안 중지되었다가 교육기관의 부족과 일반 중등교육 지망자의 학자 곤란으로 임학난을 부르짖는 오늘날에 중학강의록의 발행이 시대에 가장 적절 요구임을 절실히 느낀 동인 제씨는 경영의 새 방법으로 일반 민중의 중학지식의 보급을 위하야 진력하리라는데, 무엇보다도 그 강의록의 내용 충실을 위하야 일층 노력하는 중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이광수·장지영 등 유명인사 강사로 참여

<동아일보> 제3450호(1930년 3월 29일자) 2면에 게재된 ‘조선통신중학관’ 광고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조선통신중학관 관장으로 ‘수신(修身)’과 ‘한문’ 과목을 담당했다. 조선통신중학관에는 만해 스님 외에도 여러 저명인사가 강사로 합류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와 조선어학회 제6대 이사장을 지낸 열운 장지영(洌雲 張志暎, 1887~1976, 당시 경신학교 교사)이 조선어 강사로 참여했으며, 국어학자인 강매(姜邁, ?~?, 당시 배제고보 교사)가 수신과 한문을, 조선지리학회 회장을 지낸 김도태(⾦道泰, 1891~1956, 당시 휘문고보 교사)가 지리를, 한글학회 대표이사를 지낸 동운 이중화(東芸 李重華, 1881~?)가 역사(동양사)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한 화가 장발(張勃, 1901~2001, 당시 휘문고보 교사)이 도화(圖畵)를, 문학평론가 함병업(咸秉業, 1899~?)이 국어(일본어)를 각각 맡았다.

1년 반 통신과정…중학교, 고보 졸업 학력 인정

조선통신중학관은 매월 두 차례 강의록을 발행하고, 1년 반 만에 과정을 수료할 수 있도록 했다. 과목으로는 수신, 조선어, 국어(일본어), 한문, 영어, 역사(조선사,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 지리(일본지리, 조선지리, 세계지리, 지문학), 박물(식물, 동물, 생리, 광물, 박물통론), 수학, 물리·화학, 법제·경제, 실업(농업통론, 상업통론), 체조 등이 개설됐다. 조선통신중학관의 중학 과정을 수료하면 중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 졸업한 학력을 인정〔동아일보 제3465호(1930년 4월 8일자) 2면 광고〕 받았다.

   
▲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이 조선통신중학관을 인수했다는 <중외일보> 제1155호(1930년 3월 18일자) 2면 ‘조선통신중학 강의록 재발행’ 기사.
   
▲ 만해 스님이 조선통신중학관 관장으로 표기된 <동아일보> 제3450호(1930년 3월 29일자) 2면 광고.

만해 스님이 인수한 조선통신중학관은 1921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교육기관이다. 당시 우리글과 말로 강의하던 유일한 중학교육기관이었다.

조선통신중학관 설립은 일제 탄압으로 교육 기회가 제한된 상황에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통신교육을 조선에 도입해 교육 실험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통신중학관은 “교육방법을 학교에 한하지 아니하고 혹은 확장하야 민중화함에 지(止)하지(그치지) 아니하고 통신교육의 제도를 안출(案出)하야 발달한 인쇄술을 민중교육에 적용”〔<동아일보> 332호(1921년 7월 26일자) 1면 사설〕하기 위해 설립됐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교재인 《중학강의록》을 제때 발행하지 못하는 등 재정난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입학 지원 쇄도” 폭발적 반응

만해 스님 등이 조선통신중학관을 인수하자 당시 조선 사회는 크게 환영했다. <동아일보>는 제3448호(1930년 3월 22일자) 사설에서 “조선과 같이 교육기관이 부족하야 입학난을 느끼는 이때에 또는 공학(功學)의 뜻이 있으되 환경의 관계로 정규의 학교를 밟아 올라갈 경우가 못되는 청소년이 대다수인 형세에 있어서 통신교수의 필요는 중언을 요치 않는 바다. 통신중학관이 이 필요에 응하야 현출(現出)한 기관의 하나로 촉망되는 배 많더니 불행히 중도에 좌절이 되었었다. 이제 부활됨에 있어서 그 사명의 중차대하니 만큼 그 기초 또한 튼튼함을 오인(吾人)은 신(信)코저 하노니, 전도(前途)에 다대(多大)한 공헌이 있기를 비는 바”라고 환영했다.

조선통신중학관이 다시 운영되자 조선 민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사실은 “본 강의록이 출현되자 운편(雲片) 같이 쇄도하는 입학 지원에 본 관원의 총동(總動)으로 응접 불가실(應接 不暇實)로 철야분망(徹夜奔忙)을 극(極)한다.”는 <동아일보> 3465호(1930년 4월 8일자) 2면 게재 ‘조선통신중학관’ 광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영난 경성여자미술학교으로 넘어가

그러나 만해 스님 등이 인수한 조선통신중학관도 곧 경영난에 봉착하고, 만해 스님도 경영에서 손을 뗀 것으로 보인다. 사무실을 1930년 9월 19일 재동 86번지로 이전〔동아일보 제3495호(1930년 9월 23일자) 4면〕한 뒤, 경영을 맡은 홍세뢰가 조선통신중학관을 경성여자미술학교 기본재산으로 기부〔<동아일보> 제4237호(1932년 10월 4일자) 7면 ‘유력한 재단 얻어 여자미술교 확장’〕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조선통신중학관 인수는 만해 스님이 교육과 민족 계몽에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스님은 민족의 생존과 문화 창조, 번영과 향상을 성취하려면 민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며, 1922~23년 진행된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발기인과 상무위원으로 적극 참여했다. 조선통신중학관 인수는 만해 스님의 이 같은 교육·민족계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 교육·계몽운동 연장선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은 “만해 스님은 1922~23년 민립대학 건립 운동에 참여하고, 만해의숙을 계획하는 등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며, “조선통신중학관 인수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만해 스님이 중등교육기관을 인수해 운영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문학이나 독립운동에 치중된 만해 스님 연구의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선통신중학관 기사를 확인한 김현남 박사(재단법인 선학원 총무과장)는 “그동안 만해 스님에 대한 연구는 주로 독립운동이나 문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며, “스님의 활동 영역이 폭넓었던 만큼 스님의 불교사상이나 계몽활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만해 스님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독립운동·문학 치중 만해 연구 저변 확대돼야”

김 박사는 또 만해 스님 관련 사료를 발굴해야 할 필요성도 지적했다. 김 박사는 “‘조선통신중학관 인수 사실은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신문과 잡지 등 각종 매체에 수록된 만해 스님 관련 기사만 조사했어도 학계에 보고됐을 내용”이라며, “《한용운전집》에 누락된 기고문, 인터뷰, 대담, 기사 등 만해 스님 관련 자료를 결집해 새로운 ‘만해 전집’을 편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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