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시봉하며 맺은 인연
환속 후에도 ‘석복(惜福)’ 염두 두고
60년간 유지 받들며 저작 출간

교림출판 서우담 대표는 오늘도 7시에 사무실에 나와 바탕화면이 탄허 스님인 컴퓨터를 켠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남들보다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생활은 출가해서 탄허 스님을 시봉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습관이다.

▲ 20대에 탄허 스님을 만나 80대가 된 지금까지도 서우담 대표는 은사에 대한 존경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탄허 스님은 1934년 한암 스님을 은사로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해, 후학을 양성하고 팔만대장경 번역에 투신한 한국불교에서 손꼽히는 대강백이다.

한암 스님께 한 자 한 자 필사해서 배운 탄허 스님

1930년대 선교(禪敎)를 겸수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상원사에 설립한 ‘승려연합수련소(이하 수련소)’에서 탄허 스님은 경전 강의를 했다.

탄허 스님은 20대 중반의 나이로 수련소에서 한암 스님의 증명 하에 《금강경》, 《기신론》, 《범망경》 등을 강의하다가 27세 즈음 수련소 선객들의 부탁으로 《화엄경》과 《신화엄론(이통현)》을 11개월 동안 강의했다. 강의가 끝나자 한암 스님은 《화엄경》과 《신화엄론》을 합쳐 현토(懸吐;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을 깨닫기 쉽게 하려고 구절 끝에 우리말로 토를 닮)해서 간행하라고 부탁하셨다.

이렇게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이 출간됐다. 하지만 번역을 시작해 출간까지 17년이 걸리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 서우담 대표가 등장한다.

탄허 스님을 시봉하면서 1년으로 예정한 시간이 16년이 돼버렸다. 승려 우담은 탄허 스님이 애정을 가진 제자였다.

탄허 스님은 전날 배운 걸 다 외우는 사람이 있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책 한권을 다 외워야 다음 책으로 넘어갔는데 그걸 한 사람이 우담이었기 때문이다. 서 대표는 “투망을 던질 때 벼릿줄을 잡아당기면 싹 다 끌어올려지는 것처럼 탄허 스님은 나를 벼릿줄로 삼았다.”고 추억했다.

《신화엄경합론》이 현토작업으로 시작했다가 번역까지 하게 된 것도 우담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탄허 스님은 당신이 공부하던 식으로 제자들에게도 밤새 필사를 하라하고 그걸로 다음날 교재 삼으셨다. 탄허 스님은 “동산, 효봉, 관응, 고암 스님 등과 함께 하루에 경전을 100페이지씩 읽으면 한암 스님이 법상에서 그에 대해 법어를 했으며, 모든 대중이 필사를 했기 때문에 붓글씨를 못 쓰는 스님이 없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기를 바라는 탄허 스님께 “학인을 위해 내일 강의할 것을 대강 번역해주시면 그걸로 토론하고 교육 진도가 빨라지지 않겠냐”고 제자가 부탁하자 들어주신 것이다.

“복을 아껴쓰라”… 생일에도 일종식하며 석복(惜福) 실천

《신화엄경합론》의 출간에 대해 서 대표는 할 얘기가 많았다.

탄허 스님의 번역작업이 계속 되는 사이 우담은 만행을 떠났는데 어느 길에서 탄허 스님의 《화엄경》 전권 번역 탈고를 마쳤으나 출간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애달프고 화가 났다. 한국불교 최고의 강백이 그 엄청난 양의 《화엄경》을 번역했는데 불교계는 절 짓는 불사에만 집중할 뿐 어느 사찰이나 불자가 나서지 않는 현실이었다.

우담은 인연 있던 부산의 개인 절을 찾아가 화엄경 불사 비용 확답을 받고 그 길로 강릉에 가서 택시를 대절해 탄허 스님과 원고를 싣고 부산으로 갔다. 새벽 3시부터 밤 11시까지 각성· 성일· 통광· 무비 스님 등의 사부대중이 모여 6만여 매의 원고를 8개월여 간 교정했다.

출판을 하려고 서울로 왔는데 이번에는 기거할 곳이 없었다. 개인 절에 방 두 개를 얻어서 탄허 스님을 모시고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청룡사,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당시만 해도 출판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일본에서 사진식자 기계를 가져와 출판했다. 번역부터 시작해 17년의 시간, 국한문 혼용으로 해석하고 현토한 47권 분량, 4000만원에 달하는 재원 등 엄청난 작업이었다. 책을 출간하고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문화재단에서 수여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 중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탄허 스님은 교(敎)로만 유능한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철저하셨다. 늘 복을 아끼라며 ‘석복(惜福)’을 말씀하셨고, 아무리 복이 많아도 마구 쓰면 ‘감복(減福)’한다 하셨다. 석복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남 잘 먹을 때 안 먹는 것도 석복이라며 환갑 때까지 정월초하루, 추석과 당신의 생일에 한 끼만 드셨다. 또 많이 베풀어야 석복한다고 하셨다.

이런 일화도 있다.

탄허 스님은 66세에 위암 판정과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권위 있는 두 군데 종합병원 전문의의 소견이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은 “복진즉사(福盡卽死), 복이 다해서 병이 오고 죽는 것이지, 그저 병이 온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라며 “내가 절에 와서 그래도 복을 좀 지었으니 지금 죽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1983년 음력 4월 24일 입적한다고 예언을 하셨다.

우담은 자신의 은사의 입적을 앞두고 3개월 간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그 곁을 지켰다. 거짓말처럼 탄허 스님은 당신의 예언에 맞춰 돌아가셨다. 입적 전, 한 제자가 탄허 스님께 “여여하십니까?”라고 묻자 “멍청한 놈, 그럼 몽롱해?”라고 하셨다. 또 “법연이 다 한 것 같으니 한말씀 남기십시오”라고 하자 “일체무언이다”라고 답하셨다. 그 뒤 우담을 쳐다보아 팔을 내드리니 그 팔을 베고 바로 열반하셨다. 스님의 다비식 후 우담 자신은 3일간 쓰러져 잠을 자다 일어났더니 눈, 귀, 코에서 피가 쏟아져 이불이 피범벅이 됐더란다. “피눈물이 쏟아진다는 말이 실제한다는 걸 알았다”고 그가 말했다.

손금 닳도록 마니차 돌린 사연 듣고 3년간 ‘덧말’ 붙여

서 대표는 환속 후에도 탄허 스님의 ‘화엄학연구소’를 이으면서 《신화엄경합론》를 출간한 ‘교림출판사’에서 계속 은사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 현토해서 한글을 달아 5권으로 출간한 《화엄경》

탄허 스님의 번역 《신화엄경합론》 47권을 시작으로 재판 23권, 가로쓰기한 《대방광불화엄경》(80화엄) 5권, 세로쓰기 《대방광불화엄경》(80화엄) 5권, 화엄경 게송 단권을 냈다. 그 외에도 탄허 스님의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등 불교 경전이나 유불선에 두루 능한 탄허 스님의 《도덕경》, 《주역선해》 등 저서를 발간했지만 특히 방대하면서도 부처님 사상의 정수가 담긴 《화엄경》을 스님들이 꼭 읽길 서 대표는 바란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강원에 기증했고 조계종의 해외 포교원 사찰 등 필요한 곳에 보낼 계획도 세웠지만 총무원 국제부에서 한글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다. 반면 한문 원글이 제대로 표기된 화엄경이라는 점을 들어 중국의 대사가 직접 찾아와 전 세계 동양학연구소 560곳에 보내 달라 부탁해서 보내준 적도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덧말 대방광불화엄경》 5권을 출간했다. 한문에 한글을 달아, 화엄경을 한번이라고 읽고 싶은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을 출간한 계기가 있다.

3년 전 스님 두 분이 화엄학연구소가 어떤 곳인지 찾아왔다. 차 한 잔 대접했더니 불쑥 “경전을 봤느냐, 참선을 해봤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더니 한 스님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출가한 30년 동안 선방에 다녔다. 천지만물이 녹아지는 경계를 봤는데 그걸 봤는가?”

서 대표가 주먹으로 얼굴을 치자 그 스님이 코피를 쏟았다. 화가 난 서 대표는 “당신이 말한 그 경계가 그런 경계더라.”라고 답했다.

그로부터 3일 후 같은 스님이 서 대표를 다시 찾아와 “무식해서 내 이름도 한자(漢字)로 못쓰고, 출가해 선방만 다녔다”라며 “생전에 화엄경 한번 읽지 못하는 게 한이 된다.”고 울면서 토로했다. 서 대표는 그 스님이 먼저 읽고 싶다고 한 원각경을, 밤을 새서 한글로 덧말을 붙였다. 출력해서 보낸 지 한 달 쯤 후 스님이 신도 10여 명과 다시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분들도 한문을 몰라 경(經)을 귀로만 들었지 눈으로는 읽지 못했다며, 그 대신 공덕을 쌓으려고 동남아시아를 다니며 마니차를 손금이 닳을 정도로 돌렸다고 했다. 또 그들은 “지금 와서 우리가 깊은 뜻을 알아 무얼 하겠냐”면서 보내준 한글 덧말 원각경을 잘 읽었다고 인사했다. 이에 자극 받아 서 대표는 3년 동안 59만자를 입력했다. 한 글자에 두 발음 되는 것을 잡는 게 어려웠다. 평균 640페이지 5권으로 총 3200페이지다.

“한문을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데 그냥 두면 토착화 됩니다. ‘부차’를 ‘복차’로, ‘항복기심’을 ‘강복기심’으로, ‘부사의’를 ‘불사의’로 읽는 오류를 바로 잡았으니, 뜻을 아는 것보다 경을 읽으며 수행할 분들이 보기에 괜찮을 겁니다.”

“경전 읽는 불자와 해설해주는 스님” 아름다운 상상

탄허 스님의 원고를 정리하고 출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서 대표가 매번 출간할 때마다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출간비용이다. 그런데 출간을 접을까 하는 시점에서 독지가가 나타났다.

비구니 선경 스님의 원력으로 가로쓰기 5권을, 불심 도문 스님과 법장 화정 스님의 법공양으로 세로쓰기를 간행했다. 이번에 출간한 ‘덧말’을 단 《화엄경》 또한 “절대 내 이름을 거론하지 말 것”을 전제로 한 스님 한 분의 도움이 있었다. 이 모두가 ‘탄허’라는 걸출한 강백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서 대표는 “이제 강원에서도 한문을 배우지 않아 한문원전을 볼 수 있는 스님들이 별로 없다.”라며 “이 책을 펼치고 신도들이 낭송하면 스님이 법상에서 해설하는 모습을 보고싶다.”고 밝혔다. 그렇게 된다면 “탄허 스님이 공부할 때의 모습이 복원되는 것”이라며 “얼마나 아름답고 환희로울까”라며 문득 아련한 눈빛을 했다.

1938년생, 우리 나이로 82세인 서우담 대표는 탄허 스님 부친의 행적을 10년 간 쫓아 독립지사로 명예를 회복시켰다. 탄허 스님이 주신 법명으로 살며, 탄허 스님의 저작을 출간하며 이제는 은사가 평소에 안타까워했던 가족의 문제도 해결했다.

그런데도 그는 앞으로 유튜브에 탄허 스님의 법문을 올려서 많은 사람이 듣고 후세에도 남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끝이 없는 존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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