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사 소장 기허당 영규 진영.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활약한 기허 영규(騎虛 靈圭, ?~1592) 스님에 대한 불교와 유교의 평가는 상반된다. 불교계에서는 스님을 선양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유교에서는 추숭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왜일까?

김성순 전남대 강의교수는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연구소가 발행한 《불교문예연구》 제14집에 수록된 논문 <갑사 사적을 통해 본 의병장 영규에 대한 두 갈래 시선>에서 《갑사사적》에 수록된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壬辰義兵僧將福國祐世騎虛堂大禪師一篕靈圭事實記)>(이하 영규사실기)를 분석해 영규 스님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단초를 제시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불교계는 영규 스님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스님을 추승하기 위해 제각을 지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반면 유교는 스님의 호국충정을 상찬하거나 적극적으로 변증했다. 스님이 불목하니 일을 하면서 나무를 쪼개 무예연습을 한 것이나 박달나무를 따로 창고에 모아 전란에 대비했다는 것, 미리 전란을 예지하고 유정, 처영, 해안 등 승병장을 방문하고 고경명, 조헌 등 호남·호서지역 의병장과 교유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유교 지식인들은 특히 영규 스님의 의병활동을 호국과 군왕에 대한 충절로 평가하고, 불타의 은혜와 군왕의 은혜를 동일시했으며, 의병활동을 곧 자비와 인에 근거한 행위로 해석했다.

김 교수는 불교측은 의병활동에 수반되는 계율적 논쟁이나 서산 계열 법맥에서 분명치 않은 영규 스님의 위치 때문에 스님을 선양하는데 소극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유교에서는 스님의 의병 부대가 전란 초기에 전과를 올려 조선 정부의 위기 상황을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던 점이나 스님이 유자였던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점 등을 이유로 추숭 작업에 적극적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김 교수는 “19세기에 이르러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을 수록한 <영규사실기> 같은 문헌이 등장하고, 유교 지식인의 적극적인 지지로 계룡산에 사우가 세워진 것은 불교와 유교 간 시각적 불균형을 해소함으로써 왕조를 위해 절명한 의병장으로 영규를 추숭하려던 유교 지식인들의 노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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