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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용사에 바치는 위로와 공감의 선물

기사승인 2020.05.28  16: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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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 초대석] 참전용사 찍는 사진작가 이병용 씨

1968년 5월 19일, 춘천 공지천에서는 그 즈음에 볼 수 없던 큰 행사가 열렸다. 당시 열 살 이병용의 눈에는 춘천 인구가 다 모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가운데 흰 옷을 입고 번쩍이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한 인물은 얼마나 멋지던지 오래도록 소년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의 행사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비 제막식이었고 멋진 인물은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였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흘러 일반 회사에 다니던 그는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자주 다녔고, 그러다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평생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서른이 되기 전에 뭔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30세에 스스로 섰다〔이립(而立)〕'는 공자의 말씀이 계기가 되었다. 죽을 때까지 싫증내지 않고 인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다. 8년의 직장을 그만 두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3개월 속성으로 공부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으로 가서 일본공예예술대학에 다녔다. 학교에서 일본어와 사진 두 가지를 공부하니 즐거운 나날이었다. 한국에 와서는 충무로에 작업실을 두고 고향 춘천을 비롯해 서울 봉천동, 신림동 등의 재개발 현장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8년 간 돈 벌어봤지만 별거 아니더군요. 월급 타서 사고 싶은 걸 사는 건 1년 반 되니 끝나대요.”

사진을 시작하면서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제일 잘 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그랬다. 그러니 이제는 돈 버는 일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에티오피아 현대사의 비극, 그 중심에 참전용사 있어

   
▲ 에티오피아, 터키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나 사진을 찍은 이병용 작가.

그의 좌우명은 ‘수처작주(隨處作主)’다. 사진기를 메고 떠돌아다니는 그에게 더없이 중요하고 현실적인 내용이다.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이 내 집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며 여러 번 고난을 겪었는데 첫 고난은 작업실이 침수돼 그 동안 찍은 필름을 비롯해 사진, 기구, 책 등이 쓸 수 없게 된 일이다. 마흔, 지천명을 앞둔 시기였다. 그는 다시 공자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래서 자신의 세월을 돌아보았다. 가까이는 청계천 복원 작업이 있었고 고향 춘천을 비롯해 서울 봉천동, 신림동 등의 재개발 현장을 찍기도 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재일교포 1세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뒤로 돌아가다가 보니 어린 시절 본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비 개막식의 모습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즈음 2006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참석한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의 후손들이 자국 내에서 살기 어려워 망명을 신청했다는 기사를 봤다. 어렸을 때 자신이 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당당했던 모습과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국제사회에서 도와주지 않아 결국 식민지가 되면서 망명을 했다. 영국이 이탈리아를 쫓아내고 다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복위시켰다. 한국전이 일어났을 때 국가 간 이해관계를 떠나 자발적으로 파병한 곳은 에티오피아가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파병한 군대는 황제 근위대였으며 6000여 명 규모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3년간 치른 25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들은 “한국에 가서 자유를 안겨주라”던 황제의 엄명대로 행동했고, 한국전이 끝난 후에도 곧바로 떠나지 않고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한국을 도왔다. 우리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국가로 에티오피아가 기억되는 이유다. 그런데 그 용맹한 군인들이 귀국하고 얼마 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다. 황제를 폐위시키고 들어선 멩기스투 정권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황제의 군대였다는 이유,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이유 등으로 이들은 반역자로 찍혀 탄압 당했다. 애국자로 칭송 받던 그들은 황제가 제공한 땅과 집을 멩기스투 정권에서 몰수당했고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그들의 자식들도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살다보니 손자 대까지 가난이 대물림됐다.

우리는 분단된 나라 때문에 생긴 여러 문제를 보며 우리만의 아픔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작가는 “내가 너무 편하게 사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한국전 파병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전 참전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이후 독일이 포함돼 6개국이 됨) 중 어디부터 할까, 라는 고민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비용이나 언어의 문제 때문에 21개국 전체를 갈 수는 없었다. 이 작가는 “내가 저 나라를 찍었어야지 하는 후회를 안 남기고 싶어 그 기준으로 국가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이 왜 미국부터 안했냐고 물었다. 질문의 의미는 ‘가장 우방인 나라’,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나라’, ‘가장 지원을 많이 한 나라’ 등이었다. 하지만 이병용 작가는 “급한 나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위)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 (아래)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미망인 또는 자손들. ⓒ 이병용.

다음해 초에 바로 에티오피아로 갔다. 실제로 이 작가가 만난 그들의 생활은 너무나 열악했다. 그 열악함 앞에서 막막해진 그는 쉽게 사진기를 들이대지 못했다.

사진을 찍자는 말도 못하고 참전용사협회 앞에 가서 아침마다 앉아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를 유심히 보던 ‘다떼세’ 할아버지가 “사진 찍으러 온 거 아니냐?”고 말을 붙였다. 다음 날부터 어느 때는 3명, 어느 때는 5명의 참전용사가 협회로 왔고 그는 늙고 병든 할아버지들의 주름살을 찍었다. 할아버지가 입고 온 50년도 더 된 군복과 훈장을 찍었다. 한국을 원망하기는커녕 한국전을 떠올리며 가장 찬란하고 용감했던 젊은 자신을 떠올리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찍었다. “고맙고 죄송하다”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그들의 우정을 찍었다.

하루하루를 그들과 울고 웃으니 막막함이 좀 덜해졌다. 2007년 3월부터 3개월 동안 하루 10시간 씩 걸으며 에티오피아의 생존 참전용사와 돌아가신 분의 미망인, 유가족 그리고 걱정 없이 쫓아와서 이를 보이며 웃는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2만여 장의 사진을.

결혼 1주 만에 남편 한국전 참전해 전사한 터키 할머니 

그 다음해에는 터키에 갔다.

터키는 참전용사가 대접을 받는 분위기였다. 참전용사임을 알려주는 표식과 모자를 착용한 노인에게 젊은이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당당했다. 하지만 한국전에서 육체적인 상처를 갖게 된 노인들을 만나면 이 작가는 다시 죄송함에 얼굴 들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왜 왔냐, 정부에서 보냈냐고 묻는 그들에게 아니라고, 당신들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혼자 왔다고 답하면 그들이 감격했다. 그리고 온갖 환대를 해주었다. “집을 사지 말고 이웃을 사라”는 터키의 속담처럼 관계를 중시하는 그곳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특히 터키에서 만난 미망인의 사연은 그를 두고두고 아프게 했다. 아이세 두쥬균 할머니는 결혼한 지 1주 만에 남편이 군에 입대했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21세의 그녀를 두고 한국전에서 전사한 남편 무스타파 두쥬균의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도 몰랐다. 처음 두쥬균 할머니를 만났을 때를 이 작가는 “바위 같았다”고 표현했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분의 아픔은 짐작할 뿐, 아무리 해도 도달하거나 만져지지 않았다. 이 작가는 그 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고민했다. 우리의 동주민센터 격인 곳에 가서 두 분의 결혼증명서를 찾았다. 거기 붙어있는 증명사진을 확대·합성해서 액자에 넣어드렸다.

   
▲ 결혼 1주 만에 군대 간 남편은 6개월 만에 전사했고, 60년 만에 복원한 사진을 들고 있는 터키 참전용사 미망인. ⓒ 이병용.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 EBS · 터키 TRT 공동 제작 〈터키 용사의 마지막 편지〉에 출연했다. 이 작가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무스타파 두쥬균의 묘지 앞 흙을 퍼서 가져갔다. 할머니는 집 앞의 흙을 퍼주며 묘지 앞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 작가가 남편의 무덤을 볼 수 있도록 한국에 초대하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은 연로해서 그렇게 먼 곳까지는 못 가겠다고 했다.

이 작가는 이때를 포함해 총 4번 할머니를 찾았다. 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마지막 방문 때 할머니가 울었다. 그리고 떠나가는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처음으로 보였다.

“바위가 가로막고 있다가 녹아내리자 사람이 서 있는데 그 분이 신처럼, 부처처럼 보였어요. 그제야 막연하던 그의 아픔이 내게 전달됐습니다.”

아픔을 공감하는 일에는 세월이 없다

그는 에티오피아와 터키에서 찍은 사진으로 2008년부터 여러 번의 사진전을 했다.

2015년에는 출판문화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터키 참전용사 사진집 《한국에서 온 편지》를 펴냈다. 이역만리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전을 했고, 사진집을 내니 마침표를 찍은 것과 같겠다. 하지만 그는 그 나라에 가서 사진전을 해서 그들과 같이 보는 것이 진짜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고 했다.

2019년에는 에티오피아에서 찍은 사진으로 《원 비르의 훈장》을 펴냈다. 한국전 참전으로 받은 훈장이 시장에서 1비르(우리 돈 1000원 정도)에 팔리는 현실을 제목으로 정했다. 지난번 터키 사진집이 지원을 받아 디자인이나 종이질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번에는 본인이 출판등록을 해서 마음에 맞게 고급스러움을 갖췄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책이 파주의 출판 물류창고에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다. 그는 절망스러웠지만 “더 한 일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남의 나라에서 생사를 오간 사람들, 그 경험으로 납득 안 되는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 그가 만난 사람들이 저 멀리 타지에서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다.

침수나 화재 등 물리적인 고통보다 그를 더 힘들 게 한 건 ‘기대’와 ‘배신’이었다. 그에게 현지 사진전을 약속했던 한 단체는 1년 넘도록 시간을 끌며 ‘희망고문’을 했다. 타고난 낙천가지만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당뇨와 고혈압 등이 생겼다. 이제 그는 정부나 단체, 그리고 개인에게 기대를 갖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일이고, 혼자 끌고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07년 시작하면서 10년을 예정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는 에티오피아, 터키에서만 머물렀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인 탓이다.

올해 터키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전쟁 70주년 기념 전시를 예정하고 추진 중이지만 코로나19 탓에 진행이 잠시 보류됐다. 그는 자신의 사진기에 얼굴을 기꺼이 찍게 해준 이들에게 이 사진전을 꼭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의 손자들과 페이스북을 통해 계속 교유한다.

또 한 가지,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원치 않은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소수민족, 또는 식민지의 군인들의 사진도 찍고 싶다. 예를 들면 터키가 강제 징집해 파병한 쿠르드족, 미국이 파병한 인디언 부대와 미국자치령 프에르토리코 부대, 프랑스의 알제리 용병 등 억울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이제 세월도 많이 흐르고 국내에서도 남북의 화해무드에 따라 전쟁 이야기는 점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간다. 그런데도 이병용 작가의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유가 뭘까?

“아픔을 나눠서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 뿐입니다. 보상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위로와 공감이 먼저입니다.”

그는 “한국이 지금 잘 살아서 너무 좋다”라든가 “그때가 다시 와도 한국전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해주던 해외의 참전용사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선영 기자 budjn2009@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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