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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심·용맹심 내 빈틈없이 정진하라”

기사승인 2020.06.23  00: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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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하안겨 결제 법어

   
▲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이 하안거 결제일을 맞아 6월 8일 결제 법어를 발표했다.

진제 스님은 법어에서 “대중이 모여서 삼하구순(三夏九旬) 동안 산문을 폐쇄하고 모든 반연을 끊고 불철주야 정진에만 몰두하는 것은 끝없는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함”이라며, “간단(間斷)없는 정진만이 진취가 있고, 궁극에는 진리의 문에 들어선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이 공부는 요행으로 우연히 의심이 돈발(頓發)하고 일념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간다고 저절로 신심과 발심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며, “확철대오(廓撤大悟)에 대한 간절함이 사무쳐서 마치 시퍼런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이 온 정신을 모아 집중하지 않는다면 절대 성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이 부처님의 진리는 스님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누구든지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서 바른 지도를 받아 착실히 수행해 갈 것 같으면, 금생 한 생에 이 일을 다 마쳐 한가한 무사장부(無事丈夫)가 될 수 있다.”며, “대신심과 대용맹심을 내 빈틈없이 정진해 나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다음은 결제법어 전문.

庚子年 夏安居 宗正猊下 結制法語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衆生諸佛不相侵(중생제불불상침)
山自高兮水自深(산자고혜수자심)
萬別千差明此事(만별천차명차사)
鷓鴣啼處百花新(자고제처백화신)

중생과 모든 부처님이 서로 침범하지 아니하며
산은 스스로 높고 물은 스스로 깊음이로다.
만 가지 천 가지로 다름이 모두 이 진리를 밝힘이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이 새롭도다.

중생과 모든 부처님이 서로 침범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각각 자기의 위치에서 진리의 낙을 누린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러하냐? 산은 스스로 높음이요, 물은 스스로 깊음이로다.

금일(今日)은 경자년(更子年) 하안거(夏安居) 결제일(結制日)이라. 대중(大衆)들이 이렇게 모여서 삼하구순(三夏九旬)동안 산문(山門)을 폐쇄하고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불철주야(不撤晝夜) 정진(精進)에만 몰두하는 것은 끝없는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함이다.

중생에게는 숙세(宿世)의 업식(業識)이 태산처럼 가로막고 있고, 번뇌가 파도처럼 쉼 없이 밀려옴이라. 마치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노를 부지런히 저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멈추면 뒤로 밀려가는 것과 같다. 간단(間斷)없는 정진만이 진취(進就)가 있고 궁극에는 진리의 문에 들어서게 됨이라.

수십 년 결제안거를 빠지지 않고 하였음에도 득력(得力)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반연(攀緣)과 습기(習氣)를 놀아나서 온갖 분별(分別)과 망상(妄想)과 혼침(昏沈)에 시간을 다 빼앗겨서 화두일념(話頭一念)이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만약,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거나, 게으른 마음이 있으면 화두는 벌써 십만 팔천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과거의 습기(習氣)로 인한 다른 생각이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음이라.

이 공부는 요행(僥倖)으로 우연히 의심이 돈발(頓發)하고 일념(一念)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간다고 저절로 신심과 발심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확철대오(廓撤大悟)에 대한 간절함이 사무쳐서 마치 시퍼런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이 온 정신을 모아 집중하지 않는다면 절대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화두(話頭)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하고 이 화두를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산책을 하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기를 하루에도 천번 만번 하여 시냇물이 흐르듯이 끊어짐이 없도록 애를 쓰고 애를 써야 할 것이라.

이 부처님의 진리는 스님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누구든지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른 지도를 받아 착실히 수행해 갈 것 같으면, 금생(今生) 한 생에 이 일을 다 마쳐 한가한 무사장부(無事丈夫)가 될 수 있다.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승속(僧俗)이 따로 없다. 마음이 열려야 되는 것이지 형상(形相)을 논하는 법이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대신심(大信心)과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어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지도에 따라 빈틈없이 정진하여 나간다면, 참구(參究)하는 일을 다 마치고 진리의 위대한 스승이 되어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 홀로 걸음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방거사라는 훌륭한 거사(居士)가 있었다. 방(龐) 거사는 부처님 선법(禪法)이 유래한 후로, 마을 거사로서는 가장 으뜸가는 안목(眼目)을 갖춘 분이다. 그간에 무수한 거사(居士)와 보살(菩薩)들이 이 최상승 선법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방 거사의 안목을 능가할 만한 기틀을 갖춘 사람은 없다.

방 거사 당시는 마조(馬祖)ㆍ석두(石頭) 선사 두 분이 쌍벽을 이루어 당나라 천지에 선법(禪法)을 크게 선양(宣揚)하시던 때였다. 그래서 당시에 신심 있고 용맹 있는 스님네들과 마을 신도들은 모두 두 분 도인을 친견하여 법문을 듣고 지도를 받았다.

하루는 방 거사가 큰 신심과 용기를 내어 석두 선사를 친견하러 가서 예(禮) 삼배(三拜)를 올리고 여쭙기를, “만 가지 진리로 더불어 벗을 삼지 아니하는 자, 이 어떤 분입니까?”하고 아주 고준(高峻)한 일문(一問)을 던졌다.

그러자 석두 선사께서는 묻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 거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에서 홀연, 방거사의 마음광명이 열렸다.

“스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거사는 석두 선사께 큰 절을 올려 하직인사를 하고는, 그 걸음으로 수백 리 길을 걸어서 마조 선사를 친견하러 갔다. 마조 선사 처소에 이르러 예(禮) 삼배(三拜)를 올리고 종전과 같이 여쭈었다.

“만 가지 진리로 더불어 벗을 삼지 아니하는 자, 이 어떤 분입니까?”

“그대가 서강수(西江水) 물을 다 마시고 오면 그대를 향해 일러 주리라.”

마조 선사의 고준한 이 한 마디에 방 거사의 마음광명이 여지없이 활짝 열렸다. 제불제조(諸佛諸祖)와 동일한 안목(眼目)이 열렸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마조 선사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후로, 집에 돌아와서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家寶)와 재산을 전부 마을 사람들에게 흔연히 보시(布施)하였다. 가족은 부인과 딸이 하나 있었는데, 개울가에 오두막집을 한 칸 지어놓고, 산죽(山竹)을 베어다가 쌀을 이는 조리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 하면서 참선수행(參禪修行)에 몰두하였다. 마침내 온 가족이 진리의 눈을 떴다. 하루는 방 거사가, 딸의 진리의 기틀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한 마디를 던졌다.

“일백 가지 풀끝이 다 밝고 밝은 부처님 진리로다.”

그러자 딸 영조(靈照)가 즉시 받아서, “머리가 백발이 되고 이가 누렇게 되도록 수행을 하셨으면서 그러한 소견밖에 짓지 못하셨습니까?” 하고 아버지에게 호통을 쳤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버릇없다고 하겠지만 이 법을 깨달으면 그렇지가 않다. 이 최고의 법(法)을 논하는 데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 거사가 딸을 보고 물었다.

“너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고?”

“일백 가지 풀끝이 다 밝고 밝은 부처님의 진리입니다.”

아버지 방 거사가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그러한 소견밖에 짓지 못했느냐”며 호통을 쳐놓고는, 자신도 역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 참으로 고준한 안목이 있다. 똑같은 말을 했지만 여기에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차이가 있다. 방 거사 일가족이 다 견성(見性)을 하여 멋지게 생활한다는 소문이 분분하니, 많은 도인(道人)들이 방문하여 오갔다.

이 도를 깨달으면 거기에는 승속(僧俗)이 따로 있지 않다. 불법(佛法)의 가치는 머리나 옷의 형상에 있지 않고, 오직 그 밝은 안목(眼目)만이 천고(千古)에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단하 천연(丹霞 天然)선사가 방 거사를 찾아왔는데, 마침 영조가 사립 앞 우물에서 나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다.

천연 선사께서 물으시기를, “거사 있느냐?” 하자, 영조가 나물 씻던 동작을 멈추고 일어서서 차수(叉手)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천연 선사께서 즉시 그 뜻을 간파하시고, 다시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거사 있느냐?” 하고 재차 물으셨다. 그러자 영조는 차수했던 손을 내리고 나물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에서 단하천연 선사께서 즉시 돌아가셨다.

말이 없는 가운데 말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러한 말을 들을 줄 알아야지, 이러한 말을 들을 줄 모르면 귀한 사람이 될 수 가 없는 법이다.

이 법문의 심심(深深)한 용처(用處)를 보면, 천하 미인이 양귀비가 아니라 영조이다. 영조야말로 모든 부처님과 역대 도인으로 더불어 호리(毫釐)도 차(差)가 없는 당당한 기봉(機鋒)을 갖추었다 하리라.

어느 날 방 거사가 가족과 함께 방에서 쉬고 있다가 불쑥 한 마디 던지기를, “어렵고 어려움이여, 높은 나무 위에 백석의 기름을 펴는 것과 같음이로다.” 하자, 방 거사 보살이 그 말을 받아서 “쉽고 쉬움이여,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가 아님이 없구나.” 하고 반대로 나왔다. 그러자 영조가 석화전광(石火電光)과 같이 받아서, “어렵지도 아니하고 쉽지도 아니함이여, 곤(困)하면 잠자고 목마르면 차를 마심이로다.” 라고 말했다.

정말 위대한 가족이다. 위대한 처사이고 위대한 보살들이다. 모든 부처님, 모든 도인과 똑같은 안목(眼目)을 갖춘 분들이다.

여러 대중은 방 거사 일가족을 알겠는가? 방 거사가 말한 “어렵고 어려움이여, 높은 나무 위에 한 섬 기름을 펴는 것과 같음이로다.”한 것은 어떠한 진리를 표현한 것이며, 방 거사 보살이 말한 “쉽고 쉬움이여,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로다.”한 것은 어떠한 진리를 표현한 것인가? 또, 영조가 말한 “어렵지도 아니하고 쉽지도 아니함이여, 곤하면 잠자고 목마르면 차를 마심이로다.” 한 것은 어떠한 진리의 세계를 드러낸 것인가?

이 세 분의 낙처를 알고 가려낼 줄 안다면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와 동행(同行)할 것이다. 만약 산승이, 방 거사 일가족이 한 마디씩 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 주장자(拄杖子)로 세 분에게 각각 삼십 방(棒)씩 때렸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방 거사 일가족이 멋진 법문을 하여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불법(佛法)을 빛나게 하였거늘, 스님은 무슨 장처(長處)가 있기에 고인들에게 방망이를 내리느냐?”고 물을 것 같으면,

來年更有新條在(내년갱유신조재)
惱亂春風卒未休(뇌란춘풍졸미휴)

내년에 다시 새가지가 있어
봄바람에 어지러이 쉬지 못함이로다.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고 하좌(下座)하시다.〕

佛紀 2564年 6月 6日
大韓佛敎曹溪宗 宗正 眞際 法遠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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