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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능가 스님과 혜해 스님의 백세청풍

기사승인 2020.07.06  15: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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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말 범어사원로 나옹당 능가(奈翁堂 能嘉) 대종사의 입적으로 또 한 분 조계종의 선지식을 역사 속에 보내드렸다. 나와도 오랜 인연이 깊은 능가 스님은 몇 해 전부터 당신이 살아온 모든 이력을 정리하고 백세가 되는 해 생을 마치리라 말씀하시고 나도 공감을 표시한바 있다. 백세가 다되도록 눈이 밝아 불경과 각종 인문학 독서와 신문 방송도 능히 보셨으나 90대 이후 귀의 난청증세로 필담으로 소통했는데 한 번에 서너 시간이 보통이었다. 늦게까지 강건해서 글씨도 반듯한 달필이었다.

타고난 기골이 장대하고 심신 모두가 튼튼해서 백세장수를 누리신 보기 드문 원로로서 일찍이 괴산의 만석꾼 아들로 태어나 명문인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해방정국에 한때 김구 선생의 비서로 계셨다고 회고했다. 김구 선생의 암살과 해방정국의 혼란을 겪으면서 인생무상을 깨달은 스님은 그길로 입산출가해서 구도자로 일로정진하는 삶을 사셨다. 그러나 승려로서 뛰어난 언변과 지식인으로서의 위치 때문에 50년대 중반 불교정화 이후 십년공부도 잠깐, 휘몰아치는 6.25전후의 격랑 속에서 사회참여는 불가피하였다.

스님은 조계종 초대종정인 스승 하동산 스님과 종단의 부름에 응해서 입산수도 십 년도 안 되어 종단간부와 불국사 주지 같은 요직을 두루 지내고 70년 세계불교도대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조계종의 공직인 범어사 주지를 지내고 임기 도중 홀연히 일본으로 가서 십여년 연구와 한일불교 교류를 위해 헌신했으며 그 후 귀국 후 범어사의 암자에 머물면서 적극적인 사회활동과 겸하여 불교포교와 인재양성을 한 일은 불교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스님은 선구적인 지식인답게 승속을 막론하고 시대에 맞는 인재양성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그러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스님의 평생 화두인 인재 양성에 소홀해서 스님은 늘 종단을 걱정했다 조계종의 오랜 숙제인 파벌을 없애고 불교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들을 키우기보다 종권 투쟁과 큰절차지 각종 파벌 이권에 세월을 다 보낸 것을 비판하고 아쉬워했다. 그 점은 나와도 일맥상통해 스님과 만나면 세상과 절집안 문제로 시간이 흘러가는 줄 몰랐다.

스님은 평생 일어로 된 법화경과 불교사상서를 독하셨고 법화경의 자비, 구제사상의 법문과 실천행에 주력했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불서를 간행 보급하는 불교전도협회를 만들어 포교와 전도에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종교협의회를 창립해서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 국민적인 종교평화에 기여했다. 스님은 평소 종교를 통한 세계평화를 주창하고 사회지도층과 종교계 원로들과 교류하면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복과 지혜를 갖춘 선각자의 삶

내가 범어사 문중의 선배로 스님의 존명만 듣다가 처음 만난 것은 70년 초여름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한 노벨문학상 후보자이며 세계적인 대문호 임어당 박사의 강연회에서였다. 한참 방랑하던 시절에 문학서적을 비롯한 각종 서책과 문화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나는 유명한 임어당의 수필 '생활의 발견'을 읽은 후라 직접 세계적인 인문학자의 얼굴과 강연을 접하기 위해 한달음에 갔으나 초대권은 이미 매진됐고 청중은 만석이었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문득 만난 분이 고광덕 스님과 능가 스님 두 분이었다. 광덕 스님은 60년 초에 여러 번 만나 얼굴을 익혀 알지만 능가 스님은 처음이었고 광덕 스님보다는 능가 스님이 윗 어른이어서 스님께 혹시라도 초대권 한 장이 더 있으면 주십사 했으나 스님은 힐컷 쳐다보시고 “뭐, 여유라니?”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는 서운한 마음이었으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주최 측이 무료로 입장시켜줘서 가까스로 2층에서 약 2시간 동안 서서 임어당의 유창한 영어와 통역으로 진행된 인문학 특강을 들을 수 있었다.

중국문학의 정신과 철학을 보편적인 인문학과 인생론에 관해서 시종 풍자와 유머 해학이 풍부한 강연에 3천여 명의 청중들은 내내 박수와 폭소로 끝냈다. 임어당의 강연회는 대서특필되었고 한국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임어당은 키가 짤딸막한 분으로 고향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과 독일에서 유학을 한 영문학자로 명성을 떨친 분이다.

30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시민권이 없었다 한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크리스천이 됐으나 말년에는 중국문화와 도교 불교에도 심취해 '나는 반은 부처이고 반은 노자'라는 말을 남겼다. 어느 청중이 불교에 관해 묻자 그는 '불교는 형이상학이다'라고 답변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차원이나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본질과 현상을 설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님은 90대 중반 세계평화교수협의회를 결성해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빙하고 불교 정신으로 남북한과 세계평화를 도모하는 작업을 계획했으나 연로하시고 뒷받침이 안되어 무위에 그쳐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시기도 했다.

그만큼 불교의 사회화, 세계화에 평생 화두로 삼은 까닭이다 다비식 날, 천여 명 대중들이 참여한 청명한 날씨에 화답이라 하듯 둥근 해무지개가 스님의 입멸을 길상으로 수놓았다.

백세 원로비구니 혜해 선사의 참선수행

김소월 시인의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보주당 헤해(寶珠堂 慧海) 스님은 16세에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으로 입산 출가했다. 법기암과 마하연은 금강산의 대표적인 선방으로 나의 스승인 엄성호 스님과 70년 말 동화사의 법룡 스님 등 해방 후 수많은 고승들과 참선납자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거쳐 간 이름 높은 참선도량이었다. 스님은 여러 해 법기암, 유점사에서 참선수행 후 45년 해방된 해 삼팔선을 힘들게 넘어 봉암사 해인사 묘관음사에서 효봉, 성철, 향곡 스님 등 당대 선지식의 참선 지도를 받아 일념으로 정진하셨다.

70년대부터 반평생을 이차돈의 순교성지로 유명한 경주 흥륜사에서 비구니 수도원인 '천경림선원'을 만들어 공부와 제자들을 지도하셨다. 늘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자비로운 말씀으로 제자와 신도들을 대하면서 한편으로 출가본사인 금강산 신계사로 돌아가기를 염원하신 나머지 2004년 노무현 정권 때 마침 남북평화 교류의 길이 열려 신계사 착공에서 준공복원 때까지 4년간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참선정진으로 평생의 원을 풀었다. 스님은 남북평화교류와 통일운동의 불교계상징으로 원력을 세운 분으로 역사에 길이 자취를 남겼다.

항상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과 자비의 삶은 비구니 수행자의 큰 스승으로 추억될 것이다. 스님은 입적하시기 전 제자가 “ 스님 9시에 가시렵니까?” 물으니, “내가 잠시 금강산에 다녀와서 9시 30분에 가겠다.” 답하고 입정에 든 후 9시 30분에 입적에 들었으니 종사열반이 아닐 수 없다. 공부에 남여가 따로 없고 견성성불에 비구 비구니가 차별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비식은 능가 스님과 같은 날 6월2일, 범어사와 경주에서 동시에 법력을 기리는 해무리가 떴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불자들이 각각 봤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평생을 검소하고 청정한 계율과 수행, 그리고 보살행으로 일관한 스님은 다비 후 에메랄드 색이 나는 영롱한 사리 30과가 나왔다 해서 또 한 번 큰 화제와 신도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스님의 사리친견은 불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요즘은 매우 보기 드문 불교행사로서 타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참고로 49재가 끝나면 사리탑에 봉안할 것이라 하니 재가 끝나기 전에 친견하면 좋을 것이다.

코로나로 국민들과 세상이 불안과 고통으로 전전긍긍하는 터에 백세 두 종사님의 종사열반은 불교계와 후학들에게 오래도록 견성성불과 전법도생이라는 구도자의 정신을 계승하고 코로나에 지친 국민들과 불자들에게 위안과 교훈이 될 것으로 믿는다.

소암 | 승려 시인, 불교문화연구소장

소암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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