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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불교건축은 ‘효율적이고 발달한 건축’

기사승인 2020.10.19  13: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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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의 저자 홍병화

대다수 불자들은 조선시대를 ‘숭유억불’로 떠올린다.

고려시대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든 시기이며 불교를 탄압해 설 자리를 잃게 만든 시대라고 배웠다. 유림과 성리학, 그리고 조선 왕조가 그 역할을 자행했다고도 배웠다. 승려들은 4대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고 온갖 잡역에 동원 되는 등 비참하게 전락했다. 이런 내용이 나열되면서 불자들은 감정적으로 조선시대를 저울질하게 되었다.

그런데 홍병화 박사는 그 시대야말로 불교가 지배층을 위한 종교가 아닌 민중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민중 속에서 다시 태어난 조선의 불교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던 종교였으나, 조선을 건국한 새로운 집권세력에게는 사회적 병폐의 근원이라고 지적받아 척결의 대상이 된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조선사회를 ‘억불숭유의 사회’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를 보면 당시 억압은 불교가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을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이전 국가권력이 부여했던 사찰에 대한 특혜를 거둔 정도라고 한다.

그동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방적 지원과 비호 속에서 성장한 것을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고 본다면, 비로소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선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궁핍한 상황과 곤란한 여건은 진정 불교가 갖는 본원적 성격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런 환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다시 사회화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가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홍병화 박사는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민족사)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책은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다룬 최초의 책이다. 불교건축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루거나 일부 유명 사찰을 한정해 소개한 책은 있지만 이 책처럼 한 시대의 불교건축사를 다룬 책은 없었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가 여태껏 한 번의 호흡으로 쓰인 적이 없다는 게 믿기는가? 불교건축을 20년 넘게 공부한 나도 이게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책의 머리말 첫 구절이다.

저자 홍병화 박사는 2002년 〈조선시대 산문체계를 통해 본 일주문 연구〉를 석사논문으로, 2010년 〈조선 후반기 불교건축의 성격과 의미〉를 박사논문으로 썼다. 이번 책은 박사논문 후 10년 만에 조선시대 불교건축사 전체를 아우른 책이다.

그가 처음부터 불교건축을 전공했던 건 아니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건설 경영’ 분야가 막 생기던 때라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현장 지식이 없으면 안 되다 보니 현장 경험을 쌓으며 기사 자격증을 땄다. 건축에 대해 문외한이라 공부를 하다가 건축역사 책을 접했다. 불교건축에는 그렇게 빠져들었다.

1999년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아르바이트로 입사해 2000년부터 2013년까지는 정직원으로 근무했다. 그곳에서 한국의 사찰문화재 조사,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실무 담당, 전국 사지 조사에 참여했다. 석·박사 과정을 그때 했다. 30대를 불교건축 연구로 불태웠다. 2013년부터 3년여 간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전국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했다.

특히 신계사 복원에 실무자로 참여할 때는 북한에 80회 방문을 하며 모든 순간에 있었다. 실무의 매 순간이 어려웠고 회의장에서 북측 실무자와 언성을 높인 적도 있지만 역사의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다시 생각해도 가슴 벅차다. 자신의 성장이 조직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뿌듯함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던, 행복한 시절이다.

홍 박사는 그 시절의 답사와 실무 연구가 자신의 학문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했다. 불교건축을 누구보다 많이 조사할 수 있었던 그에게 조선시대 불교건축사 연구는 시혜 뒤 남겨진 숙제였다.

그는 자신이 정통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교건축사라는 부문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전제로 했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불교건축에서 야기되는 역사,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불교·역사·건축 등 공부분야가 넓어진 것이다.

   
▲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연구하며 당대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제시한 홍병화 박사.

가장 배척 받던 16세기, 불서 가장 많이 출간

이번 책을 쓰며 홍 박사는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를 지우고 ‘불교건축’이라는 결과물과 연결시키며 객관적인 근거에 입각해 역사를 보려고 했다.

능침사는 선왕과 왕비의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사찰이다. 조선 초까지는 능침사를 건립하거나, 산릉 인근의 사찰을 능침사로 지정했으며, 유교식과 불교식으로 두 번 제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16세기 들어서 중종 대에는 선왕과 선후에게 능침사에서 지내는 불교식 제사인 기신재(忌晨齋)까지 폐지하겠다고 했다.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사림(士林)의 집권과 이에 따른 왕실 지원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류층과 달리 16세기 천재지변이 많아 사회적으로 기근 등 불안감이 커지자 민중들은 절대적인 존재에 기대는 의례가 유행했고 사찰의 수륙재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많은 불서 중 수륙재 의식집이 많은 것은 그만큼 유행했다는 반증이다. 수륙재는 춤, 그림, 음악 등이 결합된 종합예술제로 볼 수 있다. 글을 모르던 일반 백성에게 수륙재는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고, 이를 계기로 불교는 백성 사이에 전파되어 대중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사림의 등장으로 불교가 배척됐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 사찰에서 간행된 불서의 양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관련 연구자들은 15세기는 왕실 주도로 불서를 편찬하는 시기였다면 16세기는 사찰 스스로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찍어내던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이때 찍어낸 불서의 양이 15세기는 물론 17세기 이후와 비교해도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홍 박사는 “16세기는 건축과 같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불교계의 활동보다는 불서간행과 같이 내적 역량을 축적하는 활동에 치중하는 시기였다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저는 16세기 불교의 사정을 공부하면서 궁핍했던 저희 가족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이 월급을 받으면 당시는 중·고등학교에 등록금이 있었으니까 가장 먼서 등록금을 떼어놓고 쌀, 연탄 순으로 쪼개서 쓰셨어요. 저희 가족은 당시 경제적으로 힘들었어도 어쩌면 정신적으로는 가장 건강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16세기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홍병화 박사는 당시 불교가 어려운 시절을 지냈음에도 임진왜란이 났을 때 승병을 구성하는 등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적인 건강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했다. 그렇게 이전에는 알지 못한 불교의 저면을 보자 이전보다 더 친근하고도 새로운 시선으로 불교건축을 보게 되었다.

불교의 내적 역량 축적은 향후 역사에서 불교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근거가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지배층에서 불교를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승병들의 활약에서 비롯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집권 사대부의 생각을 변화시켰으며, “무위도식하며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라 비판 받던 불교의 승려도 군왕을 모시는 신하이면서 백성이라는 인식 생겼다”는 것이다. 국가가 인정하는 승군으로 승려를 편재하고 그 지도자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사찰에 국가 차원에서 도움을 주며 사찰을 복구하도록 했다. 이때는 집권 사대부도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인식해 사찰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많은 죽음을 경험한 민중들은 더욱더 불교에 의지했는데 홍 박사는 “유교식 장례와 달리 불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보내는 의식을 통해 산 자를 위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 예천 용문사 자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476호), 17세기 후반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로 수륙재가 유행하던 시기의 흔적이 역력한 문루. 사진 홍병화 제공.

수륙재의 비중 커지며 문루·요사 규모도 커져

귀족중심의 종교에서 민중을 끌어안으며 절을 찾는 대중이 수적으로 증가하자 변화가 찾아왔다. 대중은 곧 불교를 지탱한 힘이었던 것이다.

홍병화 씨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사찰건축에서 그 변화를 발견했다. 가장 크게 꼽는 것이 문루이다.

홍 박사는 문루를 “대체로 중증건축이라서 아래층에 긴 기둥을 세워 요즘의 필로티처럼 처리하고 그 사이를 교통로처럼 쓰고, 그 위층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해 누마루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루의 대형화가 나타난 것을 조선 후기로 보고 있다.

책에는 문루의 변화에 대해 상세히 적고 있다. 문루는 17세기 3칸이었다가 17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 ‘대루’라고 지칭하기 시작해 통계적으로 18세기가 되면서 더 커졌다. 홍병화 박사는 현존하는 78동 정도의 문루 중 비교적 지어진 시기가 분명하다고 판단되는 45동을 대상으로 시기별로 규모를 정리했다. 그 자료를 보면 문루의 규모가 가장 커진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문루가 대형화된 것은 수륙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초기 문루는 문의 기능에 충실했다면, 이후의 문루는 수륙재의 설행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면서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어 규모가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 박사가 이 시기 또 하나 불교건축에서 의미 있는 변화로 치는 것이 요사의 변화이다.

조선 초기부터 17세기 초반에 지어진 요사의 경우 3칸 내외의 작은 규모로 모두가 일자형 평면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요사의 평면이 확장되는 경향이 본격적으로 보였다. 새롭게 지어지는 요사는 필요한 실의 양에 따라 다양한 평면으로 지어지겠지만 기존의 요사가 있는 경우는 실을 확장했을 것이다. 이렇게 확장을 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개심사 심검당, 환성사 심검당, 장곡사 설선당, 봉정사 무량해회 등이 있으며 구조가 ㄴ·ㄷ·ㅁ자로 복잡해졌다. 조선 초기에 안마당에 면한 요사의 규모가 3, 4칸 정도였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서는 안마당에 면한 요사가 넓어진 것이다.

요사 중에서 대중들이 모이는 요사인 대방(大房)의 등장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홍 박사는 “18세기 중반 이후 그려진 선암사 소장 〈대각국사중창건도〉에서 ㅁ자형 요사가 여러 채 확인 되었다”며 “이미 18세기에는 사찰에 요사가 많이 필요했으며, 이 대형요사들은 대부분 대방을 중심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조선 후기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야외의식과 이에 따라 늘어난 후원자의 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수용해야 할 인원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륙재의 무대가 되는 안마당이 넓어지고 이에 참석하는 일반신도들이 늘어 대중들의 휴식공간인 요사가 늘어났으며, 준비 공간으로 루가 대형화됐다는 것이다.

“조형 아닌 평면구성을 기준으로 보면”

홍 박사는 조선시대 건축물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드러냈다.

“예전에는 건축을 조형물로만 봐서 비례감이나 웅장함, 아름다움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지요. 그러나 현대건축은 이미 작게 지어진 단독주택도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전통건축 분야는 공포를 멋있게 짜고 아름답게 짓는 것만 높이 치지요. 조형물로 볼 때 조선의 문루나 요사는 볼품이 없을지 몰라도 평면구성으로 보면 신개념입니다. 요사를 보면 웃방, 아랫방이 있고 여럿이 모이는 대방, 손님이 묵는 방 등이 요사 하나에 다 들어가 있어요. 위계는 분명하지만 모여 살며, 방 간에 왔다 갔다 하기에는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잘 짜인 평면이라는 겁니다.”

아직 우리나라 건축계에서 조선시대 불교건축에 대해 투박하다거나 서민 정취가 느껴진다는 등의 “그나마 조금 후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을 그는 비판한다.

“미인대회라면 미인을 뽑지만 효자나 의인을 뽑을 때는 예쁘지 않은 사람을 뽑는 것처럼 기준만 다르게 하면 조선의 불교건축은 훨씬 발달한 건축입니다.”

집단에 대한 고려나 배려가 충분하고 효율적으로 구성해 작지만 짜임새 있으며, 삶의 궤적이 녹아있는 것이 조선시대 사찰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눈이 환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전통사찰에 가면 문루에서 분주하게 재를 준비하고, 안마당에 모여 양손을 모으고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고, 대방에 모여 노곤함을 달래던 조상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고급스럽고 형이상학을 즐기던 고려시대의 불교에서 민중들의 소란함과 번다함을 끌어안은 조선의 사찰이 훨씬 정겹게 다가올 것 같다.

박선영 기자 budjn2009@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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