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어머니

기사승인 2021.01.14  14:35:32

공유
default_news_ad1

- 뒤늦게 깨달은 당신의 자식 사랑

   
▲ ⓒ강병호

“나는 너와 숙세에 인연이 있어서 어미와 아들로 맺어져 은애의 정을 나누었다. … 너를 보배처럼 소중히 여겼고 똥오줌의 악취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젖 먹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당에 갔다가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 면 문설주에 기대어 너를 기다리곤 했다 . … 네가 집을 떠난 후로 밤낮을 가 리지 않고 눈물을 흘렸으니 이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니 이제 너의 뜻을 받아드려야 하겠구나.”

동산 양개 스님과 어머니가 주고받은 편지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이처럼 간명하게 적은 글이 또 있을까? 이런 글은 드물지만 이런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드물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 역시 그런 사랑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늙어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다. 어려서 겪은 어머니는 엄한 분이었다. 따뜻한 시선과 다 정한 말의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결코 친근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끔 할머니에게 부드럽지 않은 말을 던지는 것을 본 나는 할머니 초상을 치르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 시원하시겠어요.”

어머니는 나를 뻔히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섭섭하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가 십 리 떨어진 저수지로 낚시를 갔다. 어머니는 종종 거기에 나타났다. 점심을 굶는 자식이 안쓰러워 밥을 싸 들고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못마땅하고 거북했다. 그래서 짜증을 부리곤 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몰랐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성에 살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고 받아들였고 하나가 되었다.

어머니의 물건, 노하우를 농사에 적용

시골생활하면서 아내와 따로 떨어져 살려니 여러 가지 살림도구가 필요했다. 어머니 집에는 오래된 살림도구가 넘쳤다. 대식구가 살던 집에 어머니 혼자 지내시니 그럴 수밖에. 수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그릇까지, 그리고 또 필요한 것, 욕심나는 것은 모두 가져왔다. 요와 이불까지 가져와 어머니가 내 집에서 주무실 때 쓰시도록 했다. 조상이 쓰시던 집기를 쓰는 기쁨이 있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지만 형제들 누구도 고향집의 집기를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좋았다. 어머니가 쓰시던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이고 아버지가 술을 드시던 소주잔이나 막걸리 잔에 술을 마시며 조상을 잇는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텃밭을 가꾸려니 농사도구 또한 필요했다. 역시 어머니 집에서 해결했다. 각종 농기구, 비료, 비닐, 콩 타작을 위해 마당에 까는 천막까지 모두 가져왔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농사의 지식과 지혜였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기에 가져올 수 없었다. 보름마다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일하며 배웠다.

요리도 배웠다. 내 입에 가장 맛있는 것이 어머니의 손맛이 아닌가? 열무를 뽑아 김치를 담고, 호박을 따 새우젓으로 간을 해 찌개를 끓였다. 손님에게 열무김치를 내놓으며 내가 담근 것이라 말하면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60살이 넘도록 열무김치 한번 담가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여인들도 간간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 아내가 옆에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에게 미안했다.

가능하면 주말에 어머니를 모셔왔다. 주말에는 안성이 자랑하는 남사당패 공연이 있어 종종 모시고 갔다. 똑같은 공연이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즐거워하셨다. 박수를 치고 신이나 몸을 흔들어댔다. 허리가 굽지 않았다면, 무릎 관절이 튼튼했다면 공연 막바지에 관람객과 사당패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자리에 동참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는 가까운 미양성당에 모시고 가 미사에 참례하도록 했다. 2박 3일, 또는 3박 4일을 함께 지내곤 했다.

어머니는 자식이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기름 값을 아까워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겠다고 고집부리셨지만 고향에서 내 집으로 오는 대중교통은 아주 불편했다. 마지못해 천안에서 버스를 태워드리기도 했지만 그건 두세 번으로 그쳤다. 아무 연락이 없이 천안이나 안성으로 버스를 타고 오셔서 내 집에 이르는 길을 물은 적도 있었다. 장날 당진시장에 갔다가 탐이 나는 바지락을 보고 사서 등에 메고 오신 적도 있고 옥수수를 쪄 메고 오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드물었다. 거의 모두 내가 왕복을 했다.

가톨릭 신자이지만 아들의 불단에서 기도

3년을 그리 하니 나도 농사일에 익숙해졌다.

어머니와 농사일을 하며 컴퓨터 일기를 썼고 그 일기를 매년 업데이트 하며 드디어 농사의 때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지난달 글에서처럼 2년 간 메주를 쒀 된장을 담가봤지만 제대로 숙성이 안 되고 구더기가 들끓어서 결국 된장은 포기했다. 이제는 농사일에 어머니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어머니와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고 길이 좋아 찾아뵙는데 부담감이 없었다. 내가 부담이 없어하니 어머니도 어렵지 않게 나를 집으로 불렀다. 아흔 살이 다 되어 가는 늙은 여인에게는 가끔 남자의 힘과 기술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 어머니는 그 일을 부탁하셨고 나는 흔쾌히 달려가 그 일을 했다. 큰 밭을 임대해주고 남은 자투리 밭에 이것저것을 심은 후 수확을 하면 나를 부르셨다. 냉이를 캤다고 부르고 달래를 캤다고 부르셨다. 그렇게 부른 것이 미안한지 가끔 기름 값이라며 몇만 원을 차 안으로 던져주셨다.

어머니는 내 집에 오면 맨 먼저 불단 앞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이다. 홀로 살다 죽은 막내딸을 성당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장례 지내준 것이 고마워 그때부터 빚을 갚는다고 아버지와 함께 성당에 나가셨다. 그렇게 30년 넘게 성당에 다녔지만 내 집에 오면 불단으로 달려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올려놓으신다. 보통 만 원짜리 두세 장을 올린다. 때로는 천 원짜리 몇 장도 함께 놓는다. 참으로 큰돈이다. 성당에 헌금할 때는 만 원짜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이는 헌금하는 데 쓰라며 가끔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 한 묶음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에게는 하나님보다 아들이 더 소중했다. 어머니는 돈을 올려놓고 두 손을 모은 후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

“부처님! 우리 아들 잘 살게 해주십시오. 외롭지 않게 해주십시오.”

안성에 셋집을 얻어 홀로 지내는 것을 가슴 아파하셨다. 처자와 함께 지내지 못하는 것을 속상해 하셨다. 그게 보기 싫어 빨리 돌아가겠다고 하신 적도 있다.

그렇게 안성에 살며 ‘어머니’라는 존재를 이해하게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마야부인도 그런 ‘어머니’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야부인은 아기를 낳고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지 내 어머니를 보며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병의 고통보다 그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마야부인을 대신해서 부처님을 키운 이모 마하빠자빠띠 부인의 사랑도 마야부인에 뒤지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그 사랑을 알기에 그녀가 이끄는 비구니 승단의 설립을 허락한 것이 아닐까?

최운초(돈명)•《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 저자

최운초(돈명) .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