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4월 30일 중국 선양 중국양류식품진출공사 본사에서 열린 ‘북한동포 식량 지원 옥수수 전달 협약식’. 왼쪽은 조계종 사회부장 능관 스님이고, 오른쪽은 양류식품진출공사 총경리다. 사진 출처 : 전불련, 《대승정론》 통권 13호(1997. 6. 1.)

흔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1995년 이후부터 남북 불교 교류는 모두 중국의 베이징으로 통했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원래 의미보다 남·북한 교류에서 베이징이란 도시를 활용했다는 뜻이 있다.

현대 중국의 심장인 베이징은 북측에서 교류, 회의 장소로 가장 선호하는 도시이다. 남측에서 보면, 국외로 나가지 않고 기회비용이 적게 드는 개성 지역에서 회의하는 것을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불련은 개성보다 금강산 지역, 이보다는 국외를 더 선호했다. 또 남측에서도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교통편 측면에서도 중국 베이징은 최적의 장소였다.

북측 대사관이 있는 중국 베이징과 영사관이 있는 선양(瀋陽)에는 북측이 직영한 옥류관, 해당화식당, 류경식당, 평양관 등을 비롯해 선양시 4성급의 칠보산호텔 등이 자리하고 있어 ‘중국 속의 평양’이라 불릴 만큼 유명했다. 특히 선양의 칠보산호텔 5층 회의장은 2016년 10월 6일에 ‘10·4 선언 발표 9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토론회’가 열렸던 곳이다. 북·중 접경도시로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단둥(丹東)에서 직영한 송도원, 류경식당과 평양고려식당 등도 전문 음식점으로 유명했다.

그간 북측 인사와 교류하고 행사를 했던 분이라면, 위에 열거한 음식점이나 호텔을 이용한 경험을 이야기할 것이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방문한 것만으로도 교류한 것으로 평가하고, 당사자 스펙으로 회자할 정도였다. 북측과의 직교류 호황기이던 2000년대에도 예비회담 등 사전 접촉, 또는 비즈니스의 장소로 꼽혔다. 2008년 2월 보수정권이 출범하면서 이용객의 발길이 끊어지고, 선양 칠보산호텔은 2018년 1월 9일 폐업했다. 더욱이 코로나19 여파로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선양, 단둥 등에 개설한 북측 음식점은 모두 문을 닫고 근무하던 봉사원도 철수했다.

한때, ‘우리의 소원’ 노랫말을 합창하던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은 남북 불교 교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때찔레꽃, 매괴화(玫瑰花)로 불리는 해당화의 꽃향기가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잡아 세우듯, 해당화식당에서 불교 교류의 꽃을 처음 피웠다. 이곳에서 1997년 4월, 분단 이후 최초로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불교도 공동 발원문 채택과 동시법회 개최를 합의했다. 그날의 역사 속으로, 또 북녘동포 돕기를 계기로 ‘불교적 아젠다’를 추진한 남북 불교 교류에 대해 다시 살펴본다.

남북 동시법회를 열다

1997년 5월 14일 오전 10시, 서울 삼각산 조계사와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 남북 동시법회가 열렸다. 남측의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과 북측의 불탄절 기념행사에서 분단 이후, 52년 만에 ‘남북 불교도 공동 발원문’이 처음 발표됐다.

그날 공동 발원문에는 “불기 2541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들은 사바세계의 한 생을 중생구제에 바쳐 오신 부처님의 행적을 가슴 뜨겁게 돌이켜 보면서, 분단의 가슴 아픈 설움을 가시지 못한 채 남과 북(북과 남)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오신날 봉축 동시법회를 가지고, 사회와 중생을 대승보살도의 실천행에 용맹정진할 서원을 굳게 하고, 저희들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부처님 전에 삼가 서원합니다. … 거룩하고 지혜 구족하신 부처님. 우리나라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라의 통일을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평화적으로 실현하려는 우리 겨레에게 거룩함과 지혜를 심어 주십시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저희들의 소망을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다시 한 번 부처님 전에 간절히 발원합니다.”라고, 황병대 조불련 부위원장과 전설정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이 각기 다른 곳에서 낭독했다.

1997년 5월에 열린 남북 동시법회는 북측 조불련에서 같은 해 3월 18일을 기해 한국불교종단협의회와 조계종, 통일단체에 실무 접촉을 제의함으로써 비롯됐다. 그때 중국 베이징 실무 접촉에는 조계종 등 종단과 불교 통일단체가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북측 조불련과의 사전 협의는 평불협 미주본부를 경유하는 채널과 황유복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 교수와 중국불교협회를 경유하는 채널이 가동됐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는 그 당시에 중국불교협회 부비서장 겸 국제부장인 재중동포 신재부 씨의 협조를 받았다.

그해 4월 13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남북 공동 발원문 채택을 위한 실무회의’에는 조불련 심상련 서기장, 유성철 상무위원과 남측 조계종 김능관 사회부장, 최종환 사회과장 등이 참여했다. 그날 실무 접촉에서는 ①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불교도 공동 발원문을 채택하고, 그해 5월 14일 부처님오신날을 기해 조국 통일을 기원하는 타종과 함께 합의한 공동 발원문을 동시법회에서 봉독한다는 내용이 합의됐다. 또한 ② 제2차 남북 불교 대표자 조국 통일 기원 법회의 조속한 개최와 ③ 남측 불교계가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조불련에 빨리 지원토록 주선한다는 3개 항의 합의서가 체결됐다.

남북 불교계의 합의로 공동 발원문이 처음 채택되었으나, 통일원이 1995년 9월 발간한 《남북 종교 교류 관련 자료집》에 수록된 <조계종 문화사회부장의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 앞 편지>(1995. 4. 22.) 전문에는 “… 조계종 대표 2인(조계종 총무원 문화사회부장 시현,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민주통일위원장 법안)은 법요식 공동 개최를 위해 북경에 와 있습니다만, 북이 저희 쪽의 제안을 아직 접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실무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북쪽의 종교인들을 대표해서 조선종교인협의회 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장재철 선생을 만날 수 있어 구두로 설명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희 조계종이 추진하고자 하는 남북 공동 법요식 실무회담을 5월 2일 이전에 제2차로 이루어질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으며, 시간상 그것마저 어렵다면 상호간에 팩시밀리를 통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여 이번 부처님오신날 공동법요식이 기필코 성취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바입니다. … 부처님오신날 행사자료를 장재철 위원장님 편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이하 생략)”는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별도의 내용은 1995년 5월 22일 중국 베이징 남북 불교 회의 테이블에서 의제로 처음 상정된 다음, 2년 만에 결실을 보았다

그 당시 남북 불교 교류는 분단 이후, 교단적 성과를 처음 이뤘지만, 통일연대사업과 인도적 지원의 투-트랙 방면에서 다루어졌다. 남북 교류의 큰 골격은 북측 큰물 피해에 대한 식량 지원이 최우선 과제로 전개됐다. 남측 민간단체나 불교종단과 별개로 조계종 총무원은 1997년 4월 13일 조불련과 합의 이행에 따라 그해 4월 30일 중국 단둥을 경유하는 화물열차 편으로, 조불련 중앙위원회에 옥수수 1380톤(2억 원 상당)을 지정 기탁했다. 당시 조계종단의 1차 식량지원은 ㈜대우 심양지사의 조력을 받아 중국 선양시 중국양류식품진출공사와 계약을 맺고 진행했다.

북녘동포돕기에 나서다

‘백 년만의 대홍수’를 입은 북측은 1995년 9월 초, ‘큰물피해복구활동 긴급 지원 요청’을 유엔에 제출한 데 이어 1997년 1월 3일 <조선중앙TV>가 큰물피해대책위원회가 조사, 보고한 전년도 피해 내용을 전격 보도했다. 이에 남측의 범국민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1996년 12월 12일 발족한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는 1997년 1월 10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동포 식량 보내기 성금 5,000만 원을 기탁했다.

특히,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은 1997년 2월 26일 ‘탁발 금기(禁忌)’의 전통을 깨고, 35년 만에 처음으로 ‘자비의 탁발’ 행사를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대북지원에 비협조적이던 통일부가 1997년 3월 31일 ‘민간 차원의 대북 곡물 지원 허용 조치’를 발표하면서 불교 등 종교계의 참여가 늘어났다.

불교계는 1997년 4월 2일 ‘북녘 동포 살리기 대책기구’ 결성 회의를 개최하고, 그해 5월 6일 서울 봉은사에서 ‘북녘동포돕기불교추진위원회’(약칭 불추위)를 결성했다. 불추위는 그해 5월 20일 조계사에서 ‘북녘 동포 돕기 한 생명 살리기 100일 결사법회’ 입재식을 시작으로 전국 사찰 320개소, 단체 120여 개소, 개인 1000여 명 등 총 10만여 명 이상이 동참해 모금한 8억 469만 7000원의 성금으로 대북 식량 보내기 사업을 집행했다.

북측과 식량 지원에 관한 실무회의는 1997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중국 베이징 올림픽 에어포텔(澳洲飯店)과 해당화식당에서 열렸다. 조불련 황병대 부위원장, 심상련 서기장, 유성철 상무위원 등과 남측 조계종 김능관 사회부장, 최종환 사회과장 등이 전달 규모와 방식을 협의했다. 2차 식량지원은 그해 9월 9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성금 3억 1353만 원이 전달되고, 9월 15일을 기해 옥수수 2000톤이 조불련에 지정 기탁됐다. 이 밖에도 북한 어린이 돕기 의약품 보내기, 옥수수재단 등과 연계하여 총 4억 7000만여 원과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부의 나진-선봉지역에 옥수수 지원을 포함하여 총 6억 3000만 원 상당의 성금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3차 식량지원 등에 쓰였다.

국내에서는 대불련 등이 주도한 북녘동포돕기전국학생연대회의가 1997년 10월 16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결성되어 남한 정부의 대북 지원 촉구 등을 결의하고, 거리 캠페인과 모금 활동을 가졌다. 평불협 미주본부 대표단은 그해 5월 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 등 수해 지역을 방문하고 미화 1만 233달러 상당의 지원품을 전달하는 한편, 그해 7월 8일 평불협은 북측 조불련과 공동으로 “황해도에 국수공장을 설립한다.”는 합의사항을 공개했다. 이어 12월 29일 평양에서 ‘금강국수공장 설립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금강국수공장은 2012년까지 황해도 일대 주민에게 국수를 제공했다.

그 당시 연이은 태풍과 집중 호우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북측에 대한 식량지원은 중국의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나오는 사마천의 화두처럼 “곳간〔倉凜〕에서 인심이 난다.”는 우리 속담과 묘하게 닮았다. 그때는 ‘인심이 곳간에서 나오듯’이 그간의 반목과 갈등을 넘어 1984년 9월 북측의 수재 물자 지원에 품앗이를 한 셈이었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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