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스님 동상. 선학원 100주년 기념관인 한국불교근대문화기념관 1층 전시실에 모셨다.
▲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에 수록된, 흔히 〈조선독립의 서〉로 알려진〈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의 초고본이다. 스님의 친필 자료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에 실린〈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만해 스님이 쓴 초고본에는 제목 마지막 단어가‘개요’인데〈독립신문〉에는‘대요’라고 표기됐다.
▲ 〈제위재옥중음(諸位在獄中吟)〉은 그동안 존재 자체를 모르다가 예술의전당이 개최한 3·1운동 100주년 특별전에 처음 공개됐다. 독립운동 지사들이 옥중에서 지은 시를 만해 스님이 옮겨 적은 초본이다. 칠언절구, 또는 오언절구 시 두 수를 적고 하단에 지은이를 밝혔다.
▲ 불교중앙학림. 만해 스님은 독립선언서 3000여 장을 김규현, 김법윤, 오한현 등 중앙학림 학생에게 주어 사찰과 시중에 배포케 하는 등 독립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 1920년에 작성된 민족대표 33인의 재판 판결문.만해 스님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등과 더불어 가장 무거운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 ‘지옥에서 극락을 구하라’라는 제목으로 만해 스님의 출옥을 알린〈동아일보〉 1921년 12월 24일자 기사. 만해 스님은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넣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세 가지 옥중 투쟁 원칙 밝히고, 자신이 공약삼장에 써 넣은대로‘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실천해 나갔다.
▲ 1922년 3월 30일 만해, 만공, 성월 스님 등 비구 35명이 모여 선우공제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취지문. 선풍 진작과 회원 상호 간 자립·자애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불교정책에 대한 저항과 민족불교 수호를 천명했다.
▲ 6·10만세운동 당시 선학원에서 만해 스님을, 낙원동 근처에서 항일 승려 송세호를 체포했다는 내용의〈동아일보〉1926년 6월 9일자 기사.
▲ 〈불교공보〉제2호(1949.5)에 실린 만해 스님 5주기 추모기사.
▲ 1962년 만해 스님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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