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당신에게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편지를 쓰느라 서툰 제 글솜씨를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제 어린 시절과 당신이 살아보지 못했던 시대의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고 싶어 펜을 잡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서울의 서대문구에 살았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서 몇 분 걸으면 평화를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비둘기들이 산책하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아침이면 부모님 손을 잡고 형, 누나와 함께 공원으로 나가 몇 시간이고 놀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하얗고 높은 아파트 주택가 앞에 우뚝 솟아있는 독립문과 참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깊은 의미를 알지는 못했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이 하나 둘 묻히고 간 세월이라는 흔적은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이사를 가게 되면서 더 이상 매일 볼 수는 없게 된 건축물들이지만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 속에서나마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남들에

게는 그저 따분한 교과서 속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찌되었건 저에게 만큼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라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공부해온 독립문과 서재필 선생, 그리고 한용운 선생과 서대문형무소에 얽힌 이야기를 당신과 함께 나누며 조 금 더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독립문은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 선생이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문 건립을 발안하여 설립된 석조문입니다. 외향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독립문의 이름에는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독립문의 ‘독립’ 을 보면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떠올렸는데, 사실 이 독립의 의미는 사대외교 청산의 의미로, 원래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역할을 하던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운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와의 제후 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주권 국가로서 독립한다는 자주적 의미의 독립이라는 것입니다. 즉, 청나라와 그 외 나라에게도 휘말리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누리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되어도 조선총독부는 이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고 관리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독립이라는 문구에 예민했을 조선총독부가 어째서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의문에 대 한 정답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조선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 시켜 주었다는 정치적 선전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립문을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립문의 홍예문에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위 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함께 그 좌우 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 제국 시기의 공 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입니다. 곰곰이 되짚어봤을 때, 이런 의미를 갖는 독립문 옆에 조선인을 탄압하던 서대문형무소가 세워진 것 또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일본의 정치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열강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로서 거듭나고자 했던 당시 조상들의 염원이 담긴 독립문의 설립 배경을 알고 난 후, 복잡한 외교관계가 펼쳐지는 제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당시 조상들의 모습과 의지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우리가 또 다시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독립문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인 서재필 선생은 21살이던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인물입니다. 갑신정변 10년 후인 갑오개혁 당시 다시 귀국해서 조선인이 아닌 미국 시민으로서 이후 고종과 미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후에 서재필 선생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대중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한글로 창간했습니다. 한문을 모르는 많은 국민들도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 한글로 신문을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한문으로만 발행되던 신문이 한글로 발행되는 일은 그 당시에 꽤나 파격적인 개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개혁이 발판이 되었기에 지금 우리가 편하게 한글로 된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독립신문이 창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한문으로만 빼곡히 쓰인 신문을 읽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서재필 선생은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시키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했습니다. 각종 토론회에서 서양과 세계의 근황을 알려주고 자유 민주주의를 전파하여 봉건적 사회에 있던 백성들을 근대의 국민으로 계몽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기여한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문을 건설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다시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활동은 미주에서 한국 독립선언식을 계획해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 행진하면서 한국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고 미국 독립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것입니다. 낯선 타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행진한다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내려치는 것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대목을 통해 타국에서도 조국을 생각하는 서재필 선생의 확고한 독립의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서재필 선생은 독립 외교활동을 통해 3·1운동으로 표출된 독립운동의 염원과 참혹한 국가상황을 국제사회에까지 알렸습니다. 서재필 선생은 미국 내 한인들에게는 머나먼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서재필 선생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필두로 진행한 3·1운동과 그로부터 뻗어나온 의지의 물결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천주교계 인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엔 불교를 대표한 한용운 선생과 백용성 선생이 있었습니다.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한용운 선생은 고향인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보면서 자신 또한 투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영감과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승려가 된 한용운 선생은 부패한 한국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일본의 불교와 새로운 문물의 장점을 받아들여 《조선불교유신론》을 내고 불교계의 혁신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불교대전》과 불교잡지를 간행해 자신이 추구하던 대로 불교를 대중화하고 민중을 계몽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1919년, 한용운 선생은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했습니다. 3월 1일이 되기 전, 2월 28일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0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배포했습니다.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인 33인의 민족대표들 앞에서 한용운 선생은 조선독립을 기도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습니다. 그렇게 3·1운동의 불씨는 조용하지만 뜨겁게 붙었습니다. 봄날 꽃잎이 바람을 타고 전국을 여행하듯 3·1운동을 통해 조국 독립이라는 소원을 가진 꽃잎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그렇게 유관순이라는 꽃을 피워내기도 했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독립선언식 이후 일제에게 붙잡힐 때를 대비하여 세 가지 강령을 제시하셨습니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이 세 가지 구절은 만해 한용운 기념관의 내부에도 쓰여 있습니다.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33인의 민족대표들과 3·1운동을 진행했던 3000여 명은 일본의 경찰에게 붙잡혔고, 한용운 선생도 그 화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용운 선생은 징역 3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수감 중에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란 논설을 집필하여 일본인 검사에게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1921년 석방된 뒤에도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신간회의 경성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한편으로는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한용운 선생은 눈부신 광복을 1년 남겨두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만약에 한용운 선생이 광복을 볼 때까지 살아계셨다면, 한국의 근대 문화사와 역사가 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문학사에 있어서는 한용운 선생을 두고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또한 한용운 선생이 그의 시를 통해 일제의 눈을 피해 조선의 독립을 원하는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육사, 이상화, 윤동주와 같은 시인들이 당시 독립을 갈구하는 마음을 시에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는 을사조약 이후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일제가 만든 시설입니다. 처음에는 경성감옥이었지만 나중엔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을 위해 법을 어기며 저항했던 한국인들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는 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시관에는 옥중 생활실과 고문도구, 형벌 방과 실제 고문이 이루어지던 지하를 모형으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 사형이 집행되던 사형장과 유관순 열사가 갇혀있던 지하 감옥, 윤봉길 의사가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형무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독립 운동가들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있습니다.

제가 편하게 거닐었던 공원의 길을 어떤 어머니는 자식의 수감 생활을 걱정하고 마음 졸이며 걸었을 것이고, 어떤 학생은 광복이라는 이상을 찾아 만세를 외치며 뛰었을 것이며, 어떤 노인은 광복 후 기쁨에 버선발로 뛰어 걸었을 것입니다. 가을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밤이 길어져 차가운 서리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는 내년 12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서대문형무소 옆에 터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많은 외관이 변화하였지만 외세에 맞서고 후손에게 자주적인 권리를 가진 국가를 물려주기 위해 분투하던 한국인의 내면은 변함없으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광복을 꿈꾸던 한용운 선생의 시를 함께 보내며 저는 이만 이 긴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저와 같이 조상이 물려준 찬란한 나라와 미래를 꾸며나갈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오늘입니다.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건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바칩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 못 오시는 당신을 기루어요.

-<길이 막혀(한용운)>

From. 허인웅

허인웅•대진디자인고등학교 1학년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