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의 기초시설로 추정되는 장방형 석축. 사진 제공 용인시.

보물 제9호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가 원래 서 있던 위치를 밝힐 단서가 발굴됐다.

2013년부터 서봉사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용인시는 “3월 17일과 18일 진행한 5차 발굴조사에서 추정 석탑지 47.85㎡를 발굴한 결과 그 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현오국사탑비의 원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고 4월 7일 밝혔다.

용인시에 따르면 추정 석탑지에서 현오국사탑비를 세우기 위해 장방형으로 석축을 쌓아 올린 흔적을 발견했다. 석축을 현오국사탑비를 세우기 위한 시설로 추정한 것은 현오국사탑비 받침돌과 규모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5차 발굴조사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양정석 수원대 교수는 “현오국사탑비의 받침돌 형태와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이번에 확인된 석축 시설은 현오국사탑비를 건립했던 기초시설일 가능성이 높다”며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용인시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는 그동안 찾지 못했던 현오국사탑비의 원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발굴조사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현오국사탑비의 원위치에 대한 추가 조사와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용인시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현오국사탑비와 서봉사지를 발굴조사해 서봉사의 사역과 건물지 현황 등을 확인했다. 용인시는 이 결과를 토대로 2019년부터 서봉사 사역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현오국사탑비는 현오국사 종린(玄悟 國師 宗璘, 1127~1179)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탑비는 대각 국사 의천이 입적한 이후 화엄종단과 고려 왕실의 관계를 보여주며, 현오 국사의 행적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여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비문은 당대의 대문호이자 학자였던 이지명(李知命)이 지었고, 글씨는 글과 문장에 능했던 문간공 유공권(柳公權)이 썼다.

비문에 따르면 현오 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출가했으며, 부석사(浮石寺) 주지 등을 역임했다. 고려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현오(玄悟)’라는 시호를 내린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도록 했다.

탑비는 이수와 여러 장식조각을 생략한 채 비신 윗부분 양각면을 비스듬히 잘라낸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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