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96년 큰물 피해 입은 북한, 국제사회에 도움 요청
미온적 정부 대신 종교계 중심 민간단체 대북 지원 나서
남북 10개항 합의 불구 이행 방안 도출이나 실행은 불발

1995년 여름에는 북측이 ‘100년 만의 대홍수’라 불리는 큰물 피해를 보았다. 1995년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태풍 쟈니스(JANIS)가 북한 전역에 집중 호우를 쏟아 부어 150억 달러의 재산 피해와 52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했다. 1996년 8월에도 수마가 8개 도, 117개 시·군을 할퀴어 17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1997년에는 큰물이 없었던 대신에 가뭄과 해일이 겹쳐 피해 농경지가 46만 5000여 정보에 달했다.

1995년에는 북측이 국제사회에 큰물 피해를 처음으로 알리고 긴급구호를 받았다. 당시 유럽연합(EU)은 홍수 피해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던 북한에 50만 ECU(유럽 화폐 단위) 상당의 쌀과 석유, 의약품 등 의료지원을 국제적십자사와 국제 민간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MSF)를 통해 추진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3년간 북측에 체류하면서 식량 지원과 의료 지원을 진행했다.

유엔 인도지원국도 유엔 재해평가및긴급조정팀(UNDAC)을 1995년 8월 29일부터 9월 9일까지 수해 지역에 직접 파견, 식량난과 배급 상황을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9월 12일 유엔기구의 합동 어필(CAP, 일종의 공동모금 프로그램)로 대북 지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면서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이 시작됐다. 정치적 제한 때문에 초기에 남한이나 일본의 지원은 많지 않았고, 유엔 등 국제기구와 단체를 통해 우회 지원하는 간접 방식으로 전개됐다.

1995년에 이어 1996년 대규모 자연재해를 입은 북측이 국제사회에 긴급 도움을 요청한 것은 정권 수립 후 처음 있은 일이다. 이때 북측이 남측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쌀, 의료품 등 인도적 지원은 남북 대화의 제1 화두가 됐다. 그 당시 부정적 태도를 보인 남한 정부와 다르게 대북 지원 논의는 종교계를 비롯한 민간단체로 확산됐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 남북 종교인들은 1996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측과 남측의 가톨릭, 기독교, 불교, 원불교 대표자가 참가한 ‘남북 종교인 북경 회의’는 큰물 피해를 입은 북측에 인도적 지원을 논의하기 위한 첫 남북 민간회의였다. 이번 호에서는 이 시기의 남북 불교 교류와 함께 북측 조불련의 주요한 종교적인 활동을 정리하였다.

▲ 1996년 2월 27일 중국 베이징 다바이판디엔(太白飯店)에서 열린 ‘남북·북남 종교인 북경회의’ 참가자. 왼쪽부터 박래선 한국종교협의회 사무총장, 황병대 조불련 부위원장, 장재철 조선종교인협회장 겸 조선적십자회장, 박청수 원불교 교무, 이성타 조계종 포교원장. 사진 《통일한국》 1996년 3월호. 사진 제공 이지범.

인도적 지원 논의 첫 남북 민간회의

분단 이후, 51년 만에 남북한 종교계가 한자리에 모여 어깨동무를 했다. 팔짱을 서로 끼고 나란히 선 남북한 종교계의 만남은 표면적으로 ‘조국 통일을 위한 종교인의 역할’이 주제였지만, 실제로는 1994년과 95년도 북측의 연이은 큰물 피해에 관한 인도적 지원이 주된 관심사였다.

1996년 2월 27일 오전, 중국 베이징 다바이판디엔(太白飯店)에서 열린 ‘남북·북남 종교인 북경 회의’는 북측 종교단체를 대표하는 조선종교인협회와 남측의 한국종교협의회가 공동 주최했다. 북측에서는 조선적십자회 회장을 겸직한 장재철 조선종교인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한인철 조선가톨릭협회 사무국장, 조선기독교도연맹 임원, 황병대 조불련 부위원장 등이 참가했다. 남측에서는 이성타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박래선 한국종교협의회 사무총장, 박청수 원불교 교무, 개신교 단체의 임원이 참가했다.

이날 북경 회의에서는 동북아 평화와 인도적 지원에 관한 10개 항의 공동 합의문이 채택됐다. 이때 합의한 사항은 결국, 종교단체별로 이행 방안이 나오거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남측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지 못한 점은 물론, 북측과는 처음 접촉한 남측 인사들이란 점 이외에도 참석한 인사들이 각 종교계를 대표하는 의사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그 후 장재철 조선종교인협회의 회장은 1996년 3월 14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남북한 종교인의 단결과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보도문을 발표했다. 장재철 회장은 1990년대 이후 남북 종교인의 교류를 강조해온 대표적 인사이다.

당시 대북 지원에 필요한 규모는 1995년 9월 초순, 북측이 유엔에 제출한 ‘큰물 피해 복구 활동 긴급 지원 요청’이란 문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문건에서는 “가옥이 유실된 9만 6348세대에 침구·의류·취사 용품을 지급하기 위해서만, 한 세대 당 5098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수치는 유엔이 긴급구호로 각국에 지원을 요청한 1500만여 달러의 30배가 넘은 4억 9000만 달러에 이르는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측 종교단체가 앞장서서 인도적 지원을 요청한 가운데, 신법타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은 1996년 4월 13일부터 2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1995년 5월 북경 남북 불교회의 사항과 불교계의 인도적 지원에 관해 협의했다.

북한 동포 돕기에 대한 국내 여론은 1995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북한수재민돕기범종단추진위원회(범종단수재민돕기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96년 1월 말, 중국 마카오 등지에서 조선기독교련맹과 접촉하고, “세계 교회협을 통해 50만 불 상당의 곡물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남측 정부가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지 않는 지원은 불가하다”며, 대북 지원 창구 단일화를 요구했다.

이때 김영삼 정부의 대북 지원 가이드 라인의 문제점을 지적한 북한수재민돕기범종단추진위원회는 1996년 1월 15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김수환 천주교 추기경,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강원룡 개신교 원로목사, 김재중 천도교 교령, 최근덕 유교 성균관장, 조정근 원불교 교정원장 등 6대 종교 대표가 참가한 ‘북한수재민돕기추진위원회 고문단 회의’를 개최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날 대국민 호소문을 낭독했다. 이어 그해 6월 14일 대한성공회 강당에서 ‘북한 동포 식량 지원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했으며, 6월 21일에는 민간통일 단체를 중심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는 8월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북한동포 돕기 범국민운동 선포식’을 개최했다. 같은 해 12월 12일 조계종 총무원 불교회관에서는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공동대표 방지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가 창립돼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은 북한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한민족공동체 성금 모금’ 사업을 전개했다.

▲ 1989년 4월 4일 평양 룡화사 대웅전에서 열린 조불련 중앙위원회 중앙보고대회와 유사한 법회. 우측 가운데 자리에 선 학림당 박태호 위원장이 보고하는 장면이다. 사진 제공 이지범.

조불련, 창립을 기념하다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이하 조불련)는 1995년 12월 25일 오전, 평양특별시 모란봉구역 룡화사에서 ‘조불련 결성 50돌 기념 중앙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북측이 주간으로 발행한 대외 홍보신문 《통일신보》 1995년 12월 27일 자에는 1페이지 분량의 ‘조선불교도련맹 창립 50돐 기념보고회가 있었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1945년 12월 26일 평양에서 결성된 조불련 창립 50돌 기념법회는 비록 ‘중앙 보고대회’ 형식으로 개최되었지만, 헌공과 반야심경 봉독, 찬불가 등 불교적 의식이 가미되어 기념법회라고 할 수 있다. 북측 사회단체와 종교단체 대표 등을 비롯한 조불련 임원과 승려, 신도 400여 명이 참가한 조불련 창립 50돌 기념법회는 북측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열린 만큼이나 이례적인 대규모 행사였다.

이날 중앙 보고대회에 관해 《통일신보》는 “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와 도·시·군 위원회 교직자들, 전국 각지 사찰의 주지들, 평양시 안의 사찰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참가하였다. 기념보고회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엽대준 의장과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강영섭 위원장,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 장재철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한영수 부위원장 등 종교단체 책임일꾼들이 참가하였다. 기념보고회에서는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박태호 대선사가 기념보고를 하였다.”고 했다.

이날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은 기념사 형식의 보고문에서 “불교도련맹은 지난 50년간 불교도들의 참다운 신앙생활을 보장하면서 그들을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며, 세계 여러 나라 불교도들과의 친선과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로 불러일으켜 커다란 성과를 가져왔다.”며, “긍지 높이 총화하면서 련맹의 강화 발전을 위해 배려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조불련 창립 50돌 기념법회는 《태양의 따사로운 품》(1995년)과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2001년)에 기록된 바와 같이 1945년 12월 26일을 창립일로 기준하여 개최됐다. 조불련은 해방 후, 평양 대동강 기슭의 모란봉 영명사에 련맹 청사를 두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영명사와 함께 소실되었다. 이후, 련맹 청사는 1980년 1월 말 모란봉 남록의 룡화사에 설치, 운영하였다가 1993년 1월 모란봉 서북쪽 기슭에 지상 3층, 지하 1층의 본관 건물과 보조 건물로 구성된 신청사가 완공되면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처럼 조불련은 평양에 청사를 건립하고 조직을 정비하면서 1995년부터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조불련은 자연재해와 맞물리면서 원래 계획에 다른 의제를 추가하여 교류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기존 통일사업에다 인도적 구호물자라는 사업 성과를 도출해야 하는 ‘우선적 과제’에는 적잖은 부담을 갖게 됐다. 또 종교를 ‘사상에서의 오염원’으로까지 평가했던 북측에서 종교교류 허용은 결단코 쉽지 않은 특단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